진주성에서 순국한 호남 의병들을 기억하자- 이창수 광주 남구 주민행복담당관 팀장
2023년 04월 27일(목) 22:00
광주 압촌에서 태어난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6000명을 모집했다. 창평에서 창의사가 된 그는 선조를 구하러 서울로 향하다 왜군이 전주에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거기서 죽었다. 1592년 음력 7월 1차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둘째 아들 인후, 의병장 안영, 유팽로를 비롯한 의병 800명이 전사하였다. 장남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해 선산이 있는 장성에 모신 후 복수의병장이 되어 의병 400명을 모아 진주성으로 갔다.

나주에서 양산숙 등과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도 강화도와 경기도에서 활약하다 왜군을 쫓아 진주성으로 들어왔다.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최경회, 황진, 이종인, 장윤 등 호남 출신 의병장들도 속속 진주성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인 의병이 3600명이었다. 문헌마다 차이가 있지만 진주목사 서예원이 거느린 관군 3000명이 있어 총 6600명의 관군과 의병이 진주성을 수성하게 되었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에게 패한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 협상이 길어지자 바닷가에 거점을 마련하고 장기전에 돌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 선진리성,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 왜성이 이때 건설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 10만을 동원해 전년인 1592년 음력 10월에 벌어진 진주성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출을 도모했다.

왜군은 진주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길목을 막았다. 왜군을 지켜보던 권율, 선거이 등 조선군 지휘부는 적과 싸워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의병장 홍계남, 곽재우도 의견을 같이 했다.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김시민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곽재우는 진주성에 들어가려는 충청병사 황진을 만류하기까지 했다.

김천일, 최경회를 비롯한 호남 의병장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왜군을 진주성에서 막아야만 곡창지대인 호남이 지켜지고 나라가 보전된다고 믿었다. 왜군도 전쟁을 말리는 명나라 심유경에게 “히데요시의 명령이라 따르지 않을 수 없다”며 “희생을 줄이려면 차라리 성을 비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일본의 침략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1593년 음력 6월 중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왜군이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의병과 관군은 아흐레 동안 혼신을 다해 왜군을 막아냈지만 비교가 안 되는 전력 차이와 여름철 장마는 진주성을 사수하는 조선군에게는 최악이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밤낮 없이 공격하는 왜군을 막아 내다 지휘관 황진이 적탄에 전사했다. 다음날 장윤마저 죽고 성벽이 무너지자 왜군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은 장남 상건과 함께 남강에 뛰어내렸고 최경회와 고종후, 이종인이 그 뒤를 따랐다. 진주성에 들어온 왜군은 6만의 피란민은 물론 가축마저 남김없이 죽였다. 남강에 시신이 가득해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날의 처참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왜군도 조선군의 엄청난 저항에 3만이 죽거나 다쳐 호남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있다.

진주 남강 하면 논개가 빠질 수 없다.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로 진주성이 함락되어 최경회가 남강에 투신하자 기생으로 꾸미고 승전 축하연에 찾아가 왜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던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근처에 추모비를 세웠다. 촉석루 옆에 의기사라는 사당도 지었다.

진주성에 가보면 아쉬움이 많다. 1차 전투에 승리한 김시민은 돋보이지만 10개월 뒤에 벌어진 2차 전투에서 싸우다 죽어간 호남 의병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2차 전투에서 순국한 김천일 최경회·고종후·황진 등을 창열사에 배향하고는 있지만 함께 싸웠던 무명의 호남 의병들을 위한 추모 공간이 없다. 진주성까지 가서 의지할 데 없는 유민들을 지켜주고 십만의 왜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다 죽어간 무명의 호남 의병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날 왜군과 싸웠던 의병들의 후손이 300년 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오늘의 광주 정신은 그들의 피와 땀에서 나왔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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