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편지 쓰는 날 - 박상희 동화작가
2023년 04월 24일(월) 23:00
아버지 집에 들어서자 카톡 카톡 휴대전화 소리가 울렸다. 문자 메시지가 왔는지 아버지가 몇 번이나 쳐다보며 휴대전화 글자 크기를 크게 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얼른 다가가 아버지 전화를 확인하니 큰 언니가 보낸 문자였다. 아버지 생신에 바쁜 일이 생겨 못 온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 얼굴에 서운함이 또렷하게 보였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큰언니 보다 손주들이 보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도 조카들이 보고 싶은데 유난히 정이 많은 아버지는 오죽할까.

우리가 살던 집은 길가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농사일하러 가는 마을 사람을 보면 그냥 보내지 않았다. 잠시 쉬어가라고 붙잡고는 찐 고구마나 감자를 내놓거나 막걸리 한 잔이라도 꼭 대접하곤 했다. 바쁘다고 손사래 치면 물 한 잔이라고 떠주곤 했다. 남에게도 베풀기 좋아했는데 사랑하는 손주들에게야 무엇이든지 아까워할까. 감나무에서 딴 감과 밭에서 캔 고구마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가 올 때마다 꺼내 주었다.

잠시 후 여동생 가족이 우르르 들어오니 갑자기 아버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조카들이 아버지 턱에 볼을 비비고 안기자 얼굴이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축하 노래도 부르고 아버지를 중심으로 식탁에 빙 둘러앉아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웃는 아버지 모습이 쓸쓸해 보여서 자꾸만 눈물을 쏟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일흔 여덟 살인 아버지는 이 년째 혼자 살았다. 세탁기 돌리는 걸 배우고 전기밥솥에 밥하는 걸 배웠다. 처음엔 어려워하더니 몇 번의 실패를 한 다음 곧잘 했다.

며칠 전, 남동생이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새벽에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밥솥이 고장 났는지 밥이 안 된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남동생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전기 코드가 빠져 있었다고 한다. 평생 어머니가 해 준 밥만 먹고 살다가 얼마나 외롭고 힘이 들었을까. 씩씩한 척 웃음을 머금은 채 홀로서기 하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복지회관에서 붓글씨도 배우고, 노래도 부르고 게이트볼도 새로 시작하여 운동 배우는 걸 즐거워했다. 나도 아버지 닮아서 운동 좋아한다고 했더니 등을 다독였다. 나이 들수록 음식은 소식을 하고, 몸은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 가서 며칠만 계시자고 했더니 아버지는 부모가 되어서 자식 성가시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하는 게 아버지께 최선일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손 편지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편지지를 사다가 아버지께 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편지란 많은 생각을 거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음을 가다듬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해 커다란 종이에 매직으로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연 만들어 줄 때 즐거웠던 이야기를 쓰고, 잘 키워 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썼다. 편지 마무리에 처음으로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도 고백했다. 편지를 보내고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는데 편지 잘 받았다고 전화하는 아버지 목소리가 낭랑했다. 무엇 보다 글씨가 큼직해서 좋다는 말에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하기 힘든 이야기도 편지로 쓰니 더 깊은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내가 보낸 편지를 직접 보여 주며 자랑했다고 뽐냈다.

모두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휴대전화 문자가 편리할 것이다. 문자는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쓰기 쉽지만 손 편지는 생각을 여러 번 거르게 한다. 그동안 내 자식만 생각했던 지난날들이 죄송스럽고 이제야 철이 드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귀한 보물처럼 생각하는 손 펀지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백내장이 진행 중이어서 휴대전화로 보낸 문자를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오늘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우리 모두 큰 종이 한 장 펴놓고, 부모님께 큰 글씨로 편지 한번 써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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