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역군 4·19 영웅들- 이병열 4·19 민주혁명기념사업회장
2023년 04월 12일(수) 22:00 가가
4·19 민주 혁명을 이뤄 낸 영웅들은 6·25 전쟁을 체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더 참혹하고 끔찍한 동족상쟁의 잔인무도한 살상과 폭격에 따른 공포, 동족 간 불신이 만연한 가운데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도 생활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연합해 국토를 수복한 뒤에도 시골 지역은 밤이면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의 습격이 잇따랐다. 그 속에서 불안과 공포, 전쟁의 비극과 비참함을 누구보다 깊이 느낀 세대다. 따라서 우리 조국에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의 전쟁이 재발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4·19 영웅들의 강한 의지다.
4·19 영웅들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 못 먹고, 못 입고, 못 신고 구호물품으로 어렵게 생활한 세대다. 그러면서도 1960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민주화의 초석을 다졌다. 헌법 전문에 3·1 독립운동과 더불어 4·19 민주 이념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유다.
4·19 민주 혁명을 초래한 근본 원인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 독재 정권의 무도한 부정부패에 국민적 불만이 누적된 데 있었다. 혁명의 도화선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3인조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 부정 선거를 자행하는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민주당원과 시민들에 의해 점화됐다. 민주당원들은 선거 무효 선언 후 12시 40분경 머리에 두건을 쓰고 1000여 명의 학생·시민과 함께 ‘곡 민주주의 장송 데모’를 하며 전남도청을 향해 행진했다. 금남로에서 경찰과 충돌로 이필호 의원 등 다수가 붙잡혀 갔고 조계현 씨가 총대에 맞아 쓰러졌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마산에서도 3·15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행방불명됐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됐다. 이 사진이 전국에 보도되자 경찰의 잔혹성에 전 국민이 치를 떨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0~60명의 정치 깡패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항일 의병과 학생독립운동 등 불의에 항거하는 전통이 깊은 광주에서는 1960년 4월 18일 저녁 광고생 11명과 부고생 한 명이 하숙방에서 항거를 모의했다. 4월 19일 10시 30분경 광고생들은 교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과 선생님을 뿌리치고 나가 광주 4·19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시내로 나온 학생들은 공고·상고 등 각 고등학교로 달려가 부정선거 무효와 부패한 독재정권 타도 데모에 동참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오후 2시경에는 구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 모여든 학생들이 경찰들과 투석전·육탄전을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 물대포 소방차, 공포탄을 앞세워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밤 9시 20분경 광주경찰서 앞에 운집한 데모대에 경찰 돌격대가 실탄 사격을 하면서 일곱 명의 사망자와 5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전국적으로는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급기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고 1960년 7월 29일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러한 4·19 영웅들의 고귀한 회생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초석이 됐고 4·19 민주 이념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4·19 영웅들은 6·25 전쟁 이후에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다. 1966년부터 월남전쟁에 다수가 참전했다. 박정희 시대는 경제 발전을 위해 독일 광부로 갔고, 중동 건설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국가 경제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경제 성장의 최전선에서 산업화 역군으로서 국가의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공시켜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 경제 대국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역군이었다.
이제 80대가 된 4·19 영웅들은 아무런 보상도 혜택도 받지 못한 채 4·19 정신과 민주 이념을 후배들에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늘 애국애족을 생각하고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며 황혼 길을 걷고 있다. 이들에 대한 보훈 차원의 국가적 지원이 아쉽다.
항일 의병과 학생독립운동 등 불의에 항거하는 전통이 깊은 광주에서는 1960년 4월 18일 저녁 광고생 11명과 부고생 한 명이 하숙방에서 항거를 모의했다. 4월 19일 10시 30분경 광고생들은 교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과 선생님을 뿌리치고 나가 광주 4·19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시내로 나온 학생들은 공고·상고 등 각 고등학교로 달려가 부정선거 무효와 부패한 독재정권 타도 데모에 동참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오후 2시경에는 구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 모여든 학생들이 경찰들과 투석전·육탄전을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 물대포 소방차, 공포탄을 앞세워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밤 9시 20분경 광주경찰서 앞에 운집한 데모대에 경찰 돌격대가 실탄 사격을 하면서 일곱 명의 사망자와 5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전국적으로는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급기야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고 1960년 7월 29일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러한 4·19 영웅들의 고귀한 회생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초석이 됐고 4·19 민주 이념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4·19 영웅들은 6·25 전쟁 이후에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다. 1966년부터 월남전쟁에 다수가 참전했다. 박정희 시대는 경제 발전을 위해 독일 광부로 갔고, 중동 건설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국가 경제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경제 성장의 최전선에서 산업화 역군으로서 국가의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공시켜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 경제 대국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역군이었다.
이제 80대가 된 4·19 영웅들은 아무런 보상도 혜택도 받지 못한 채 4·19 정신과 민주 이념을 후배들에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늘 애국애족을 생각하고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염원하며 황혼 길을 걷고 있다. 이들에 대한 보훈 차원의 국가적 지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