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비로소 말이 되게 하려면-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3년 04월 03일(월) 00:30
환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는 그리스 철학자는 어떤 사람을 찾았던 것일까. 이 일화는 ‘사람’ 없는 세상은 그만큼 어두운 세상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지금의 세태가 이 상황과 꼭 닮은 꼴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그 속뜻을 변명하고, 덧칠과 부정을 예사로 하는 시대다. 그러니 이 시대의 귀한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을 ‘말’이 되게 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말의 힘과 무게가 사라진 세태가 심각한 이유는 이런 상황이 일상의 익숙함이 되면서 생기는 문제들에 있다.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소위 ‘대세’라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문제의 상황을 심화시키면서, 다시 깊은 불신과 피해의식의 늪에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옳은 쪽에 있으며, 늘 억울한 피해자라고 믿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두 가지 조건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말이 된다. 서로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하지만, 소통 대신 오해와 왜곡만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말이란 표현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은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라고 불리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기표는 발음과 음성, 표기, 단어 표현 등의 부분이다. 서로 듣고 보는 지각적 활동을 함으로써 전달된다. 반면에 기의는 기표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듣거나 읽어서 기표의 의미를 추출하는 영역이다. 다시 말하면 기표는 문자와 음성 등이며 기의는 기표가 뜻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의 핵심 개념이다. 굳이 소쉬르의 이론을 깊이 모르더라도 말이 표현과 의미의 구조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이미 많이 알고 있는 터다. 예를 들면 누군가 ‘봄’을 말하면 상대방은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한다. 그리고 ‘벚꽃 구경’을 대화 주제로 이어가거나 제안하기도 한다. 봄의 기의를 공유하며 함께 확장해 나가는 모습이다.

언어의 양축인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원래 공정하게 일대일로 상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표를 통해서 기의를 완전히 표현하려고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기의라는 것이 어떤 고정된 방식을 통해서 생성되는 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상 기표는 기의를 최대한 붙잡으려고 하지만 기의는 결코 완전하게 붙잡히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기의는 고도의 노련함으로 ‘나 잡아 봐라’하는 놀이를 본질로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표현(기표)과 의미(기의)의 관계는 작은 차이, 소소한 음성과 몸짓에도 달라지며 늘 ‘삶의 한복판에서’ 살아 움직인다. 기의는 관습적이며, 자의적이고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기의의 특성을 외면하고 기표를 남용할 때 계속해서 기표들을 남발하며,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파괴된다. 그래서 일방적인 기표의 오용은 결코 ‘말’이 되지 못하고, 그 사람의 무지와 사유의 한계만 드러낸다. 우리가 천금 같은 말이라고 믿는 것은 실상은 기표라는 껍데기인 경우가 많다.

책임 없는 무의미한 기표, 의미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기표는 언제나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불신과 심한 고통을 남긴다. 말의 표현과 뜻은 언어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언어와 문화의 공동체는 경험과 감정, 기억의 공유를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구나 가족, 친구, 동료, 사회 등 크고 작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산다. 이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그물망을 이루며.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공유하는 주체들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래서 개인화된 기표가 시대정신으로, 집단의 독점 이익을 위한 기표가 미래를 위한 결단으로 둔갑하는 것을 구경만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요즘 가장 핫한 음식이 ‘오므라이스’란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죄 없는 오므라이스의 기의는 완전히 실종되고 개인의 사유화된 추억과 향수의 기표와 기호인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기의 없는 기표는 기껏해야 껍데기일 뿐이다. 때마침 4월, 수많은 이유와 아픔으로 ‘껍데기는 가라’는 함성의 힘찬 기의가 되살아 오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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