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재평가를 통한 ‘나의 해방’- 명혜영 광주시민인문학 대표·문학박사
2023년 02월 21일(화) 00:30 가가
딸로서, ‘아버지’라는 세 글자는 가부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를테면 엄마와는 다른 문화를 경험하게 해 주는 어떤 정서와, 어떤 시각과, 어떤 언어를 통해 청년기의 필자에게도 아버지는 일찌감치 연구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었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사회주의자 빨치산 출신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장열히(?) 죽었다는 웃픈 상황에서 시작된다. 가족과 친척을 온통 곤경에 빠뜨린 “잘난” 사회주의가 구호에 그치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국가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를 읽으며 자란 딸은, 걸핏하면 아버지의 평생 지침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비난의 표적으로 삼았다. 그 화살의 첨단에는 딸과 아버지라는 거리만큼 디테일하게 처참히 까발려진 인간의 ‘모순’(=진실)이 유머러스하게 매달려 있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산다.
딸은 사흘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조문 온 생전 아버지의 주변인들을 통해 비춰지는 70년 현대사를 마주하며 아버지를 재평가하게 된다. 소설은 그런 실존주의자인 딸의 재평가 일지에 의해 ‘전직 빨치산 아버지’가 주의가 아닌 ‘아버지-사람’으로 자리매김된다. 그리고 유언대로 유골이 산하에 뿌려지며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결말이다. 풀어 말하자면, 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아버지는 생전의 아버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격의 아버지로 재탄생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소설을 읽으며 나의 아버지는 어떠했던가를 끊임없이 반문했다. 환갑을 코앞에 두고 객사한 나의 아버지.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를 겪으며 얻게 된 연민의 감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에 대한 이해나 공감, 화해 같은 성찰은 부족하지 않았나? 자문해 본다.
1931년생인 나의 아버지는 농업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일찌감치 영특함을 인정받으며 가문을 일으킬 장손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낸 아버지는 나라 잃은 ‘설움’을 통해 ‘울분’은 배웠지만, 일본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불가해하게도 양가감정을 갖게 되었던 터였다. 그의 의문부호는 오랫동안 미결로 남았다가 이윽고 딸인 필자에게로 전이되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어떤 미션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30대 중반에 펼쳐진 딸의 인생은 그런 아버지의 미션을 대리 수행하기 위해, 유품인 ‘한일사전’을 품에 안고 도일(渡日)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담은 여기까지. 가족에게 아버지는 나무와 같은 존재로 수직적 관계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그러나 족보에 여자 후손들을 등재시키는 등 딸들에게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엄마였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유학이 곧 지식 가늠의 척도였던 시대의 적자인 아버지는 그야말로 부창부수, 남존여비 사상의 실천자였다.
그 시대의 유교남들은 모두 그러했다는, 아니 2023년인 현재도 그러한 남성문화가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와 동시에 책임감을 느낀다. 이렇듯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젠더 감수성 부재는 이해되지도 공감되지도 못한 채 봉인된 상태였다. 아버지의 궁금증을 풀 열쇠를, 적어도 60여년 의 경험과 인문학을 통해 이 손에 넣었다고 자부하는 지금, 아버지가 부재하다. 그렇게 박제된 30년의 세월을,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계기로 해제해 보기로 했다.
계묘년 설 명절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네 명의 자매들과 ‘아버지’의 추억을 회상,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자 각자가 꺼내 놓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퍼즐 조각을 양산해 내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인 아버지에 대한 회상의 결은, 자연스레 이해하고 용서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해서 ‘나’가 아닌 ‘가문’을 위해 살아야 했던 ‘장손의 무게’를 이해하고, 유교 문화의 희생자로서의 면모도 재평가되며, ‘아버지-사람’의 또 다른 버전의 재탄생을 맞이했다.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고아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내 안에 봉인되었던 아버지를 해제해 그와 화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나의 해방’을 꿈꿀 수 있었던 건 아닐까?
1931년생인 나의 아버지는 농업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일찌감치 영특함을 인정받으며 가문을 일으킬 장손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낸 아버지는 나라 잃은 ‘설움’을 통해 ‘울분’은 배웠지만, 일본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불가해하게도 양가감정을 갖게 되었던 터였다. 그의 의문부호는 오랫동안 미결로 남았다가 이윽고 딸인 필자에게로 전이되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어떤 미션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30대 중반에 펼쳐진 딸의 인생은 그런 아버지의 미션을 대리 수행하기 위해, 유품인 ‘한일사전’을 품에 안고 도일(渡日)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담은 여기까지. 가족에게 아버지는 나무와 같은 존재로 수직적 관계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그러나 족보에 여자 후손들을 등재시키는 등 딸들에게는 휴머니스트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엄마였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유학이 곧 지식 가늠의 척도였던 시대의 적자인 아버지는 그야말로 부창부수, 남존여비 사상의 실천자였다.
그 시대의 유교남들은 모두 그러했다는, 아니 2023년인 현재도 그러한 남성문화가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와 동시에 책임감을 느낀다. 이렇듯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젠더 감수성 부재는 이해되지도 공감되지도 못한 채 봉인된 상태였다. 아버지의 궁금증을 풀 열쇠를, 적어도 60여년 의 경험과 인문학을 통해 이 손에 넣었다고 자부하는 지금, 아버지가 부재하다. 그렇게 박제된 30년의 세월을,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계기로 해제해 보기로 했다.
계묘년 설 명절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네 명의 자매들과 ‘아버지’의 추억을 회상,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자 각자가 꺼내 놓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퍼즐 조각을 양산해 내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인 아버지에 대한 회상의 결은, 자연스레 이해하고 용서하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해서 ‘나’가 아닌 ‘가문’을 위해 살아야 했던 ‘장손의 무게’를 이해하고, 유교 문화의 희생자로서의 면모도 재평가되며, ‘아버지-사람’의 또 다른 버전의 재탄생을 맞이했다.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고아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내 안에 봉인되었던 아버지를 해제해 그와 화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나의 해방’을 꿈꿀 수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