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세상과 무오류성에 대한 환상-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3년 02월 06일(월) 00:30 가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실수는 무능과 무지의 반증과 결과라고 여기는 탓이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성찰이자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르고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그것을 실수라고 말한다”라고 하지 않는가. 실수를 부정하는 것은 실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고, 같은 실수의 반복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여기에 실수가 습관이 되는 이유가 있고, 실수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불행이 일어난다. 이런 뜻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가장 큰 의미는 자기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용기와 행동에 있다.
닫힘과 열림의 대립적 관계는 문을 닫아 놓은 채로 열어 놓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정과 일상적 관계, 공적 영역에서도 같다. 일방적이고 폐쇄적이면서 동시에 상호적이고 대화적 개방성의 관계는 없다. 밖을 향한 문을 안에서 닫아걸고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일 뿐이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에서 닫힘과 열림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다룬 사람이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1902~1994)다. 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유대인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난 포퍼는 빈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유명한 대표 저서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다. 포퍼는 1938년 3월 독일의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오스트리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 저술을 시작했다.
포퍼는 인간의 역사를 열린사회와 닫힌사회의 투쟁 과정으로 규정한다. ‘열린’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상황과 조건에 대한 모든 가능성에 대한 개방이다. 열린 관계는 누구라도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나’ 자신 역시 틀렸을 수 있음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열린 세상의 조건은 진리의 일방적 독점을 거부하고 다른 목소리, 다른 시선, 다른 경험을 매도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가 말하는 ‘열린사회’가 완전한 사회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열린사회는 늘 움직이며 변화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린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며, 이는 전체주의의 조건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전체주의 문제는 정치 영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와 상황에서도 깊게 스며든 전체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개방을 표방하며 공부하는 모임이나 닫힌사회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조차 ‘열린사회’적 태도는 먼 이야기다. 다른 의견과 시각은 불편해서 일사불란한 단합을 해친다는 이유다. 하지만 ‘열린’이라는 표현은 비판과 토론이 가능할 때만 건강한 의미를 생성한다. 충분하게 열린 관계에서 비로소 서로 충돌하는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엇갈리는 목표들이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닫힌사회는 마력이나 금기의 위력으로 통제되며, 특정한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규율을 마치 자연법칙과 같은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한다. 과거의 부족사회처럼 ‘닫힌사회’에서는 사회적 금기와 규정을 해가 뜨거나 계절의 주기가 바뀌는 것과 같은 불변의 절대적 질서 체계와 법으로 간주한다. 결국 굴종과 침묵 강제 속에서 금기는 더 많은 금기를 만들고 억압적 규율로써 ‘나’의 오류에 대한 반증과 검증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차단한다.
열린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모두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정은 개인의 무능과 열등함에 대한 지적과 공박이 아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독단과 그 위험을 막는 길이다. 이런 의미에서 논박이 가능한 이성적 대화와 반증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포퍼의 비판적 사유는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오류에 대한 강박적 환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다. 포퍼의 말처럼 “우리는 금수(禽獸)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 열린사회로 가는 길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퍼가 말하는 ‘열린사회’가 완전한 사회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열린사회는 늘 움직이며 변화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린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자신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며, 이는 전체주의의 조건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전체주의 문제는 정치 영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와 상황에서도 깊게 스며든 전체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개방을 표방하며 공부하는 모임이나 닫힌사회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조차 ‘열린사회’적 태도는 먼 이야기다. 다른 의견과 시각은 불편해서 일사불란한 단합을 해친다는 이유다. 하지만 ‘열린’이라는 표현은 비판과 토론이 가능할 때만 건강한 의미를 생성한다. 충분하게 열린 관계에서 비로소 서로 충돌하는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엇갈리는 목표들이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닫힌사회는 마력이나 금기의 위력으로 통제되며, 특정한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규율을 마치 자연법칙과 같은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한다. 과거의 부족사회처럼 ‘닫힌사회’에서는 사회적 금기와 규정을 해가 뜨거나 계절의 주기가 바뀌는 것과 같은 불변의 절대적 질서 체계와 법으로 간주한다. 결국 굴종과 침묵 강제 속에서 금기는 더 많은 금기를 만들고 억압적 규율로써 ‘나’의 오류에 대한 반증과 검증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차단한다.
열린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모두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정은 개인의 무능과 열등함에 대한 지적과 공박이 아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독단과 그 위험을 막는 길이다. 이런 의미에서 논박이 가능한 이성적 대화와 반증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포퍼의 비판적 사유는 큰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오류에 대한 강박적 환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다. 포퍼의 말처럼 “우리는 금수(禽獸)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 열린사회로 가는 길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