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 창문과 담배꽁초 - 채희종 정치담당 편집국장
2023년 01월 24일(화) 22:00
평일 오후, 점심을 먹고 금남로를 걸어 사무실로 돌아올 때마다 매번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빌딩 모통이마다 삼삼오오 모여 식후 연초를 즐기는 회사원들, 그 발아래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들. 일상의 고단함 달랠 한 모금 담배일 수도, 그저 끊지 못한 웬수같은 습관일 수도 있다. 저마다 흡연의 이유는 있겠지만 짓눌리고 비틀어진 채 널브러진 꽁초의 모습은 한결같다.



버거운 삶에 대한 위로

꽁초만 보면 30~40년이 지난 일임에도 선연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1980년대 단독 주택들은 중앙에 안집(주인집)이 자리하고, 바깥쪽에 셋방이 위치하는 게 일반적인 구조였다. 거기에 셋방은 방벽이 담벼락을 겸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그 담벼락에는 조그만 유리 창문을 내어 환기나 햇빛을 받아들였다. 유리 창문을 열면 대문과 골목길, 심지어 오가는 사람까지 볼 수 있었다.

다섯 가족이 살았던 어린 시절 셋방도 똑같은 구조였다. 1981년 겨울의 어느 날 밤으로 기억한다. 춥고 함박눈이 내리는 깊은 밤이었다. 갑자기 아버지가 담벼락 창문을 열더니 “김 형사, 걱정 말고 들어들 가게. 나 내일은 농약 치러 가야 해서 서울 못 가니 얼른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담벼락 밑에서는 “감사합니다. 그럼 형님만 믿고 저희는 갈게요”라는 피로에 지쳤지만 반가움이 역력한 음성이 들려왔다.

1980년 5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이 5·18 항쟁 기간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이후,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경찰관 두 명이 한 조로 집 주변을 서성이는 날이 잦았다. 이날 감시는 다음날 예정된 5·18 유족회원들의 상경 투쟁에 대비, 동향 관찰을 위해 배치된 것이라고 다음날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경찰들이 추운 날씨에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늘어 놓은 푸념들이 담배 연기에 실려 유리창 틈을 통해 방으로 흘러 들었고, 아버지는 잦은 접촉으로 안면이 있던 이들의 고생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다 담벼락 창문 아래 수북히 쌓인 담배꽁초를 발견했다. 이 꽁초들은 한편으론 영하의 추위를 쫓는 모닥불이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5·18이라는 아픔을 안고 사는 같은 광주시민으로서 희생자 가족을 감시해야 하는 죄스러움,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였을 것이라고 어른이 되어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1990년 여름이었다. 대학 시절의 집도 방벽이 담벼락을 겸한 주택이었다. 날씨가 더워서 유리 창문을 열어둔 터였다. 자정을 넘어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이었다.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니가 어떻게, 오빠는 어떡하라고” “나도 이젠 어쩔 수 없어, 집에서 오빠가 아직도 취직을 못했으니, 이제 선 보러 나가래” 30분간 이어진 얘기를 요약하자면, 여자는 남자가 취직하기를 수년째 기다렸지만 남자는 직장을 얻지 못했고, 더 이상은 부모님의 성화를 견딜 수 없어 맞선을 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적으로 헤어지자는 여자의 통보였다. 남자는 울며불며 사정했지만 여자는 뛰어가 버렸고, 흐느끼며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한참 뒤에야 자리를 떴다.

당시는 취업 준비를 하던 복학생이었던 만큼 “취직을 못하면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이 강했던 탓인지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등교하면서 유리 창문 밑에 쌓인 담배꽁초들을 볼 수 있었다. 이 꽁초는 30년 전의 일이지만 취직 못 하면 결혼도 못 하고, 돈 없으면 출산도 포기하는 현 시대 젊은이들의 절망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힘차게 도약하는 한 해 되길

흡연율은 경제 상황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흡연율은 질병관리청이 통계를 집계한 1998년 35.1%를 기록한 이후 매년 1% 내외 떨어져 2007년에 25.3%까지 내려가는 추세였지만, 경기 불황이었던 2008~2011년은 오히려 흡연율이 올라 4년간 27%대에 머물렀다. 다행히 2012년부터 감소세를 보여 2021년(올해 1월 집계) 현재 역사상 가장 낮은 수치인 19.3%로, 20%를 최초로 하향 돌파했다.

이같이 평균 흡연율은 역대급으로 낮아졌지만, 최근 집계에 따르면 취업·결혼에 직면한 청년(19~29세)과 이들 청년을 자녀로 둔 중년(50~59세) 세대만 흡연율이 상승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 위기에 몰린 가장과 청년들의 어려움이 한층 커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결혼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는 비율이 절반이고, 열 명 중 네 명이 투잡(two job)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코로나 4년째인 올해는 취업이나 결혼을 하려는 청년과 어깨 무거운 가장들이 토끼처럼 힘차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chae@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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