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난·쏘·공’ - 송기동 예향부장
2022년 12월 27일(화) 00:45
“어느 날 나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철거반-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내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그제 늦은 밤, 조세희(80)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책장에 꽂혀 있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 200쇄 기념 한정본(2005년 12월)을 꺼내 ‘작가의 말’을 읽었다. 작가는 “나는 지금도 박정희·김종필 등 이 땅 쿠데타의 문을 활짝 연 내란 제일세대 군인들이 무력으로 집권해 피말리는 억압 독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다.

12편의 연작 단편소설로 구성된 난·쏘·공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 1980년대 중반, 대학문에 들어선 기자 역시 신입생 때 난·쏘·공을 처음 읽었다. 더욱이 전공이 도시계획이었던 터라 난·쏘·공은 머릿속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카메라를 들고 서울 시내 재개발을 앞둔 몇몇 동네를 찾아다녔던 것도 난·쏘·공과 무관하지 않다.

1987년 4월 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護憲) 발표를 하던 날, 서울 시내 여러 재개발 지역에 철거반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쳤다. 그 가운데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을 뒤늦게 찾았을 때 동네는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동네 골목길 한쪽에 마련된 주민들의 임시 비닐하우스 안에서 만난 한 초등학생은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교과서가 땅에 묻혀 버렸어요”라며 울먹였다. 전공 대신 언론의 길로 들어선 단초(端初)로 그날 일을 꼽을 수 있다.

조세희 작가가 펴낸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 또한 아끼는 책이다. 기자로서 필생(畢生)의 책 한 권을 남긴다면 르포와 사진, 단편소설을 묶어 작가와 닮은 꼴 책을 내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 작가가 난·쏘·공을 쓰던 ‘슬프고 겁에 질린 시대’와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를 표방하는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작가가 40여년 전 한국 사회에 던진 물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송기동 예향부장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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