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시대의 관용- 김정희 전남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2022년 12월 08일(목) 00:15
오늘의 세상은 기술이라는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가 하나같이 기술 일변도의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다. 70년대 이후 한국도 온 국민의 힘을 산업 발전에 결집시켰으며, 그 결과 지금은 세계 11위라는 경제 성장국의 대열에 서게 됐다. 짧은 시간 동안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인의 저력은 세계가 주목할 만큼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와 정신문화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한 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우리 자신의 인간성, 도덕성 그리고 사회성을 한 번쯤 겸허히 되돌아 보자.

때 늦은 감이 드나 이제 생존을 위해서 기술 시대에 관용의 삶을 실현해야 한다. 관용의 삶은 인내와 절제를 의미한다. 기술인은 매사를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데서 관용 자체를 쉽게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의 양심을 늘 다시 일깨워야만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비로소 새로운 싹이 돋아 나듯이”(요한 13,24) 그 누구도 이러한 우주론적 법칙을 부정하지는 못할진저! 공익을 위해서 사심을 버리고,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관용의 정신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관용’은 고통을 수용하고 인내하며 한없이 기다리는 숭고한 철학적 정신력이며, 또한 나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기보다는 ‘다른 이의 뜻’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열린 마음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술인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너를 짓밟을 수밖에 없다’는 일차원적 논리에 매몰된 채 관용의 삶을 포기했다. 어찌 이런 상황을 ‘내 탓은 아니고, 남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관용의 삶은 고통을 기피하지 않고 오히려 수용함으로써 실현된다. 이런 삶은 단순히 흑백논리가 아닌, 너와 나의 대화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기술인은 너를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하는 삶이란 ‘내적인 진리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길이며, 그리고 삶의 전제로서 그 내적 진리가 삶의 의미임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오늘의 기술인은 이러한 내적인 진리의 힘에 의해서 관용의 삶을 다시 체험하고 단련해야 한다. 상호 신뢰와 사랑도 체험하고 단련하는 삶 속에서 전제된다. 관용을 체험하고 단련하는 것은 자기를 다스리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내는 것이며, 고통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내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이란 “극기복례”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도리가 바로 나 자신의 인내와 절제임을 밝힌다. 무한한 인내와 절제로서 힘의 한계를 분명하게 그을 수 있는 자만이 이웃과 협력, 단결, 조화 그리고 대화가 가능하다. 어떤 의미에서 관용은 포용이다. 어머니들의 가슴에서 무한히 녹아내리는 사랑 같은 것. 그와 같이 인간의 도덕적 정신이 기술 속에 투영될 수 없다면 그런 기술 사회는 폭력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폭력은 자신은 물론 남에 대한 책임도 부정한다. 관용의 정신은 바로 이러한 무질서한 힘을 극복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선 나부터 먼저 죽는 연습을 실천해야 한다. “죽음은 삶의 연습”이라고 한 플라톤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살려면 나부터 먼저 죽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정신의 황무지가 되어 버린 우리의 삶의 현장을 책임져야 할 모든 사람들-교육하는 사람들을 필두로 사회 지도자들-은 부디 관용의 삶을 본받아서 모든 사람에게 믿음, 희망, 사랑이 넘쳐 흐르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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