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박 논과 메뚜기 지혜- 황옥주 수필가
2022년 11월 01일(화) 00:30
찻집 ‘연정’ 토방에는 예쁠 것도, 귀할 것도 없는 몇 가지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토란 가지 토마토에 구석에는 초라한 부추도 있다. 투박스럽고 아무렇게 생긴 그릇이나 스티로폼 박스 안이 농장(?)이다. 하나하나의 갖춤새가 찻집 주인의 고무신발과 딱 어울린다. 농장주가 보건 말건 방울토마토 한두 알 훔쳐 먹어도 부담 가지 않아 좋다.

특이한 작물이라면 두 개의 플라스틱 함지박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다. 작은 것에 다섯 포기, 큰 함지박에는 여덟 포기가 전부다.

함지박 논은 봄에 물만 채워 놓으면 올챙이 밥이 저절로 생겨나고 개구리가 뛰어들어 알을 낳는다고 한다. 신통하다. 근처 어딘가 더 넓은 놀이터가 있을 법한데 굳이 함지박 논에서 살겠다니 말이다. 아마 오염 안 된 물이라서인지 모르겠다.

가을이 저물건 말건 함지박 논은 추수한 적이 없다. 참새들이 노리고 엿볼 것은 당연하다. 사람 그림자가 얼씬대면 달아나고 조용하면 되돌아온다. 재잘대며 벼 알 쪼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해마다 심게 된다나.

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추석 며칠 뒤 K교수와 연정을 들렀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벼, 계절에 어긋남 없이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2킬로가 넘었던 초등학교 길 양쪽은 그야말로 툭 틘 들판이다. 하굣길은 거의 날마다 벼이삭을 까먹으며 해찰을 즐겼다.

잠시의 상념에 빠져 무심코 벼를 바라보던 순간 깜짝 놀랐다. 딱 한 마리, 벼를 갉아 먹고 사는, 머리 푸른 메뚜기가 붙어 있었다. 메뚜기가 놀랄 대상은 아니지만 몇 십 년 만에 본 벼메뚜기다. 지금은 농촌에서도 메뚜기 보기가 어렵다. 농약 때문일 게다. 논둑길에 넘어지면서 닭 먹이로 잡았던 일은 나만의 추억이 아니다.

메뚜기는 종류도 많고 식성이 왕성하여 엄청나게 먹어대는 해충이다. 1톤의 무리가 2500명의 식량을 하루에 없애 버린다 한다. 그런 피해를 그려놓은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의 ‘대지’다. 바람 타고 떼가 한 번 나타나면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들이 앉은 일대는 완전히 폐허로 바뀌고 만다.

그 후손 한 마리가 겨우 다섯 포기의 벼 속으로 숨어 들었다. 사진을 찍는다 어쩐다 소란을 피워도 나 모르쇠다. 그래도 속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어디서 태어나 살다가 어찌하여 고향을 떴을까? 가까이엔 논도 없다. 메뚜기는 뛰는 곤충이라 능히 날지 못하는데 벼 몇 포기 찾아내기까지의 집념이 눈물겹다.

다음 날도 K교수와 또 연정을 들르게 됐다. 멀리서 오신 문우 대접 식당이 근처여서다. 어제의 메뚜기가 생각나 벼 포기를 살펴보니 흔적이 없다. 언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출입구 앞이라 불안을 느꼈으리라. 살아가기 위해선 안전한 곳이 아니면 시련과 인고가 따른다.

삶은 ‘탐진치’로 더럽혀져 가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는 짐을 지고 일방통행의 길을 간다. 사치스런 삶에도 좌절은 있고 그래서 때로는 탈출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유를 가진 그런 순간이 행복한 때다.

길은 많다. 어떤 길을 골라 나답게 사느냐가 문제다. 길을 찾는 것이 지혜이고, 잘못 든 길이라면 돌아서야 하는 깨달음은 더 큰 지혜다.

세상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 법칙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기쁨이나 행복이 무한히 이어진 채 상승할 수는 없다. 이카로스가 실증했다. 한계를 넘으면 다음은 추락이다. 크게 이뤘다고 크게 웃어봤자 덧없는 일이다. 많이 얻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크게 웃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뛰다 지친 메뚜기가 오염 안 된 벼를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뻤을 것이다. 위협을 느꼈기에 다시 떠났을 것이다. “지혜란 구해야 할 것 및 피해야 할 것에 대한 지식이다.” 키케로가 남긴 명언이다.

나라가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잘못 디뎌 빠진 한 발을 간신히 빼고 나면 금방 다른 발이 빠진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고 만사가 네 탓이다. 세상 떠난 김동길 교수님의 “이게 뭡니까”가 절로 생각난다. 길이 아님을 알았으면 바꿔야 하고 변해야 산다. 장자는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니라” 했는데 말 잘하는 정치가들은 변명과 조작의 귀재들이다.

낯짝 없는 메뚜기도 아는 ‘지혜’를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을 터, 이(利)와 권세 앞에서는 ‘교활한 술수’ 말고는 지혜의 작동이 안 되는 모양이다. 어두워도 강물은 길을 알고 도도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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