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정권 성패의 시험문제
2022년 08월 18일(목) 00:45 가가
1945년 2월 미·영·중·소 수뇌부는 얄타에서 모여 종전 후 문제를 논의했다. 미국의 루스벨트가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권고하자 스탈린은 그 대가로 러일전쟁(1904) 이전 제정 러시아가 갖고 있던 이권 반환을 요구했다. 요동반도의 대련(大連)과 여순(旅順) 등 중국 내 영토를 달라는 말이었다. 장개석이 거부하자 스탈린도 참전을 거부했다. 그해 7월 미·영·중·소 수뇌부는 포츠담에서 만났는데, 이때는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비밀리에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하자 놀란 소련은 8월 9일 전격적으로 대일전에 참전했다. 자칫 아시아에서 아무런 전리품도 챙기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자칭 무적 황군(皇軍)이라던 관동군(關東軍)은 지리멸렬했다. 만약 관동군이 만주에서 소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외국군이 진주한다고 해도 분단만 되지만 않았다면 이후의 정세는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원폭에 큰 충격을 받은 일본은 8월 10일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미 국무장관 번즈는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 연합국 최고 지휘관에게 종속된다. 일본국의 최종 통치 형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거부했다.
항복 조건이 거부되었음에도 도쿄에 원폭이 투하될 가능성을 겁낸 일왕 히로히토는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고, 다음날 무조건 항복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은 8월 15일 서안(西安)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라고 토로했다. 외세가 득세하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일본의 예상보다 빠른 항복은 한반도 정치 지형에 결정적 변화를 초래했다. 백범의 예상대로 소련군은 1945년 8월 22일 평양에 진주하였고, 미군 제24 사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지 이틀 후에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렇게 해방과 동시에 되찾은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5년의 식민 통치 끝에 해방된 나라에서 제1의 국정과제는 친일 잔재 청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를 온존시키는 반역사적 정책을 채택했고, 친일파들은 여전히 제 세상인양 활개 쳤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정치 세력은 모두 도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회(자유당)와 친일 지주 중심의 한국민주당(한민당)이라는 두 친일 정당이 여와 야를 이루는 비정상적 정치 체제가 만들어졌다.
역사학계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계승하려던 민족주의 역사학계와 맑스의 사적유물론을 따르는 사회경제사학계는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던 좌우학자들이 주축이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자국사를 난도질하던 식민사학계는 매국 친일파들이 주축이었다. 미 군정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은 제거되었고,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월북해 북한 역사학의 중추를 이루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병도, 신석호는 남한의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식민사학이란 이름표를 실증사학으로 바꿔 달고 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켰다.
유일하게 보수도 진보도 없는 이 갈라파고스에서 이병도, 신석호는 여전히 국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데 필자는 이들이 말하는 ‘나라 국(國)’자가 대한민국(國)인지 대일본제국(國)인지 늘 궁금하다.
문재인 정권은 적폐청산을 요구하는 촛불정신과는 정반대로 적폐 중의 적폐인 식민사학과 한 몸이 되었다가 명분을 잃고 정권도 빼앗겼다.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만약 식민사학과 한 몸이 되는 길을 택한다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역시 말로가 좋을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비단 윤석열 정권뿐만 아니라 모든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시험문제였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35년의 식민 통치 끝에 해방된 나라에서 제1의 국정과제는 친일 잔재 청산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일파를 온존시키는 반역사적 정책을 채택했고, 친일파들은 여전히 제 세상인양 활개 쳤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정치 세력은 모두 도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에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회(자유당)와 친일 지주 중심의 한국민주당(한민당)이라는 두 친일 정당이 여와 야를 이루는 비정상적 정치 체제가 만들어졌다.
역사학계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계승하려던 민족주의 역사학계와 맑스의 사적유물론을 따르는 사회경제사학계는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던 좌우학자들이 주축이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자국사를 난도질하던 식민사학계는 매국 친일파들이 주축이었다. 미 군정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은 제거되었고,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월북해 북한 역사학의 중추를 이루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병도, 신석호는 남한의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식민사학이란 이름표를 실증사학으로 바꿔 달고 총독부 역사관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켰다.
유일하게 보수도 진보도 없는 이 갈라파고스에서 이병도, 신석호는 여전히 국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고 있는데 필자는 이들이 말하는 ‘나라 국(國)’자가 대한민국(國)인지 대일본제국(國)인지 늘 궁금하다.
문재인 정권은 적폐청산을 요구하는 촛불정신과는 정반대로 적폐 중의 적폐인 식민사학과 한 몸이 되었다가 명분을 잃고 정권도 빼앗겼다.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만약 식민사학과 한 몸이 되는 길을 택한다면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역시 말로가 좋을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비단 윤석열 정권뿐만 아니라 모든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시험문제였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