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림의 차이나 4.0] 타이완과 타이완 사람들(2)
2022년 08월 08일(월) 22:30
김하림 조선대 중국어문화학과 명예교수
2000년 5월 17일 저녁 땅거미가 내려앉은 광주공원은 활기가 넘쳤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천잉쩐(陳映眞, 1937∼2016) 선생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광주공원에서 출발하여 도청 앞 분수대까지 이르는 횃불시위 행진을 준비하는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회의’의 참가자들도 모두 흥분과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타이완, 일본, 오키나와 등지에서 온 참가자들은 ‘원 차이나’(ONE CHINA), ‘천황제 폐지’ ‘오키나와의 독립을’ 등과 같은 자신들의 국가에서는 주장하기 힘든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횃불을 든 채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사 후에 만난 천잉쩐 선생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김 교수! 역시 광주는 광주입니다!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주춧돌이 되고 있어요!”라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 선생은 타이완에서 ‘하나의 중국’을 이룩하고자 활동하는 중국통일연맹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는 저명한 문학가였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인 1959년에 등단했다. 1961년 졸업 후에는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제약회사에서 근무했다. 1968년 마르크스 레닌주의 및 중국 공산당·좌익 관련 서적을 소지하고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통칭 ‘민주타이완연맹’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36명이 체포되었고, 천잉쩐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악명 높은 ‘녹도(綠島: 타이완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섬으로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의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1975년 장개석 사망 이후 특사로 출옥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 통치 시절에 이러한 유형의 사건은 다수 있었다. 출옥 후 천잉쩐은 지속적으로 작품 창작 활동과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79년 타이완의 향토문학 논쟁 시기에 재차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곧바로 석방되었다. 그는 ‘야행화차’ ‘장군족’ ‘산길’ ‘충효공원’ 등과 같은 소설을 통해 타이완 사회의 구조적 문제, 국민당 통치의 잔혹성과 잔인성, 국제 자본주의와 연계된 타이완 사회의 경제적 문제와 이로 인한 민초들의 고달픈 삶 등과 같은 문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런 창작 활동으로 인해 ‘타이완의 루쉰’이라는 명예를 짊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 활동 외에 그는 1987년 ‘중국통일연맹’을 조직하고 초대 주석을 맡아 타이완과 중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지지하는 층은 많지 않았으나, 그는 중국의 평화적 통일이 중국의 미래를 보다 발전시키고 중화민족의 부흥에 기여하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시기에 한국을 방문하여 민주화 현장을 취재하고, 이 소식을 타이완에 전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기회가 되는 대로 한국을 방문했다.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회의’의 창립에 타이완 대표로 참가하여 주도했고, 이 과정에도 광주를 방문했다. 2005년 여순 사건 기념식에도 참가하여 2차 대전 후 냉전 시기 권력에 의해 자행된 민간 학살에 공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혹은 타이완이나 다른 지역에서 천 선생을 만날 때마다 천 선생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역할, 광주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강조하는 말씀을 자주 했다.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와 발전의 초석이 될 것이고,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문제와 논쟁에 대해 알고 싶다고 관련 자료를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아쉬움은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

천 선생은 2006년 중국 대륙의 인민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부임하였고, 강의를 하다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치료 후 다시 중풍이 발생하여 입원 치료 중 2016년 영면했다. 그는 중국 혁명의 원로들의 묘지인 팔보산(八寶山)에 묻혀 있다. 외면적으로는 명예로울지 모르나, 타이완에서 태어나 중국 대륙에 묻혔으니 그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이라는 통일에 대한 그의 염원은 여전히 타이완과 대륙에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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