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편당(偏黨)과 탕평(蕩平)
2022년 07월 21일(목) 00:15
고대에는 당(黨)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봤다. 고대의 정치에 대해서 서술한 ‘서경(書經) 황극(皇極)’조에 “치우침이 없고 당이 없으니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니 왕도는 평평하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는 구절이 있다. 무리를 짓는 당(黨)과 사적으로 치우친 편(偏)을 왕도의 실현을 저해하는 나쁜 요소로 비판하고 있다. 국왕은 이 당과 편을 배척하고 탕탕하고 평평한 왕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탕평(蕩平)이란 말이 나왔다. 당파를 가리지 말고 두루 등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대부 계급이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한 북송(北宋) 때부터 당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는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학가였던 구양수(歐陽修)는 ‘붕당론’(朋黨論)에서 당을 둘로 분류했다. 그는 “군자(君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행하지만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사익을 추구한다”면서 대의를 추구하는 군자들의 당을 진붕(眞朋), 사익을 추구하는 소인들의 당을 위붕(僞朋)으로 구분했다. 군자들이 대의를 추구하기 위해 만든 진붕은 군주가 가까이 해야 하지만 소인들이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위붕은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형법 역할을 했던 ‘대명률’(大明律)에는 간사한 자들이 만든 간당(奸黨) 처벌 조항이 있다. “붕당을 결성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하는 자는 모두 목을 베고, 처자는 종으로 삼고 재산은 관에 몰수한다”고 엄하게 규정했다. 붕당 결성 당사자는 사형으로 목을 베고 그 처자식은 종으로 삼고 그 재산은 관에 몰수하는 것이니 ‘간당’으로 몰리면 자신은 물론 집안이 도륙 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붕당의 결성과 그것이 초래할 부정적 현상을 예견했던 인물이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다. 이준경은 어린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 보좌하면서 중종 때의 기묘사화나 인종 때의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士林)들을 신원시켜 주었던 중신이었다. 조선은 재상을 지낸 인물이 죽기 직전 마지막 기력을 짜내 국왕에게 유차(遺箚)를 올리는 전통이 있었다. 선조 4년(1571)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된 이준경은 이듬해 죽음을 앞두고 유차(遺箚)를 올려 ‘지금 이런 저런 말로 붕당을 만들고 있는데 나중에 나라의 큰 우환이 될 것’이라고 진언했다.

이준경의 유차는 정국에 큰 파란을 낳았다. 이준경이 말한 붕당이 율곡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모이는 사림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4대 사화를 극복하고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사림들은 이준경을 강하게 비난했고, 이이도 “진실로 군자라면 천백 사람이 무리를 짓더라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만 소인이라면 한 사람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반박 상소를 올렸다. 자신과 사림은 군자의 당이라는 뜻이었지만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당(自黨)은 진붕(眞朋)이고 상대당은 위붕(僞朋)으로 비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이는 훗날 이준경의 예언대로 붕당이 큰 문제가 되자 각 정당을 붕당을 화해하고 조절하는 조제(調劑)를 평생의 정치 신념으로 삼았다.

왕조 국가에서 가장 큰 비극은 국왕이 한 당파의 편을 드는 당심을 가질 때이다. 국왕은 당과 편이 없는 탕평책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같이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이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핵심 원인은 탕평(蕩平)을 버리고 편당(偏黨)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 수혜로 등장한 윤석열 정권 또한 대다수 국민들이 볼 때 탕평이 아니라 편당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집권 초 지지율 하락의 근본 원인이다. 문재인 정권 때의 운동권 카르텔이나 윤석열 정권의 윤핵관 또는 검사 카르텔이나 국민들이 보기에는 오십보백보다. 무더운 여름 국민들의 짜증을 자아내는 편당심의 인사 말고, 더위에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탕평심의 인사를 보고 싶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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