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시를 넘어서는 시 -조정 시집 ‘그라시재라’
2022년 07월 13일(수) 22:00
처음 시를 쓸 때에는 시에 사투리를 많이 썼었다. 서정성이니 향토성이니 같은 것에 대단한 고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석의 시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인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로 된 절창을 몇 편 남겼다. ‘여우난골족’ ‘모닥불’ ‘가즈랑비’ 같은 시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은 백석 시에 사용된 사투리의 본뜻을 이해하고 암기해야 하는 고난을 추가해야 했지만, 그것은 이 땅의 시 교육이 문제이지 백석의 시에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그 뜻을 모르더라도, 백석의 시 전체를 조망하고, 입안에서 시어의 말맛을 느끼고, 머릿속에 시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사투리 또한 우리의 언어다. 언어가 공동체의 문화와 역사를 담는 그릇이라면, 사투리가 그릇이 아닐 리 없다. 어떤 경우에는 사투리에 더한 감정과 한이 담기기도 한다. 백석의 시가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조정 시인의 ‘그라시재라’는 백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투리 활용법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사투리는 책의 부제 ‘서남 전라도 서사시’에 어울리게끔 언어 그 자체로 성립한다. 다시 말해, 활용되는 게 아니라 존재한다. 전라도 사람이라면, 특히 전라남도 서남 지역 사람이라면 “그라시재라” 하는 말을 금방 알아들었을 것이다. 당신의 말이 옳다는 뜻이다. 당신의 음성을 계속 듣겠다는 뜻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당신의 언어를 믿겠다는 뜻이다. 제목의 뜻과 같이 조정 시인은 전라도 서남 지역 여성들의 언어를 받아쓴다. 여성들은 월출산 아래 한동네에 산다. 근방 가까운 곳에서 혼인해 와 그곳에 정착해 산다. 역사와 운명은 그들의 삶을 쥐고 흔들었다. 전쟁을 겪었고, 전후 학살을 보았고, 가족을 잃었다. 그런 중에 살아남았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었고,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들의 감정과 한, 기쁨과 슬픔을 듣는 일과 다름없다.

‘그라시재라’의 여성들은 돌아가며 화자가 된다. 입장을 바꿔가며 주인공이 되었다가, 관찰자가 된다. 먼 데 이야기를 전하다가 불쑥 아주 가까운 곳의 일화를 공유한다.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에 함께 눈물짓다가, 고약하고 허튼 일에는 함께 성을 낸다. 우스운 일에는 함께 웃고, 고쳐야 할 것은 같이 바로잡는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듣는 동안에는 내내, 내 곁에 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은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들의 비극과, 세월이 지나 얻은 그들의 혜안이 우리네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익숙한 억양으로 마구 뒤섞여 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뜻과 소리, 기억과 사연의 카니발이다. 이 카니발은 뜻밖에도 우리가 거대한 역사 속에 잠시 잊었던 우리의 진짜 역사를 끄집어낸다. 선량한 개인의 역사가 어쩌면 진짜 역사일 수도 있음을, 즐거운 혼돈과 진득한 감동 속에서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라시재라’는 시집의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을 넘어서는 책일지도 모른다. 넓게 보아 소설책이라 할 수 있고, 보는 각도에 따라 역사 서적이나 녹취록이 될 수도 있다. 풍부한 용례가 실린 언어학 자료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한 권의 시집이 된다. 시의 가능성과 보폭을 무한히 확장하는데, 서울말로 쓰인 시를 서구의 이론으로 분석하고, 수도권의 독자와 나누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의 시 문단과 출판의 현실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호남 사람이라면,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이 울림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어머니나 할머니를 떠올리며 한 시절을 다시 호출할 수 있다. 호남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책의 끄트머리에 실린 서남 방언 색인이 책의 이해를 돕는다. 누구든 이 이야기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공동체이므로, 그 언어에는 수많은 사투리가 공존하고 있으므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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