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왕비와 영부인
2022년 06월 23일(목) 02:00 가가
성종은 재위 13년(1482년) 8월 전 왕비 윤씨 문제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윤씨는 투기(妬忌: 질투)한다는 이유로 3년 전에 쫓겨난 뒤였다. 이날 성종은 경복궁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으로 불렸던 세 대비를 만난 후 윤씨 문제 처리를 결심했다. 세 대비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 추존한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 한씨를 뜻한다. 사육신 사건을 고변했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었는데, 그는 “후일에 발호(跋扈: 제 마음대로 행동함)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도 “신이 늘 정창손과 함께 있을 때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거들었다.
이미 쫓겨나 서인(庶人)으로 전락한 전 왕비를 예방하라는 말은 곧 죽이라는 뜻이었다. 청송부원군 심회(沈澮)와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셔서 큰 계책을 일찍 정하셔야 합니다”라고 한발 더 나아갔다. 윤씨를 죽이는 것을 대의로 포장하는 말장난이었다. 예조판서 이파(李坡)는 “옛날 한 무제가 죄가 없는 구익부인(鉤익夫人)을 죽인 것은 만세를 위하는 큰 계책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구익부인은 중국 한(漢)나라 무제의 후궁이었던 첩여 조씨(趙氏)로서 무제가 일흔 살 때 아들을 낳았다. 무제는 위태자(衛太子)를 폐위시킨 후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가 조씨를 죽인 후 태자로 봉했는데, 그가 소제(少帝)다. 조씨를 죽인 것에 비판이 일자 무제는 “이는 어린애나 어리석은 자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과거 나라에 난리가 난 것은 어린 임금의 어미가 젊었기 때문이다”라고 합리화했다.
여러 대신들 중 불안에 떨고 있는 윤씨를 동정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고, 윤씨는 당일로 좌승지 이세좌(李世佐)가 가져온 비상(砒霜)을 먹고 죽어야 했다. 윤씨를 죽이라고 주청했던 대신들은 훗날 그 아들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의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는 조선 왕비들의 운명이 그다지 순탄치 못했음을 말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친동생 넷이 모두 사형당하는 비극을 목도해야 했던 것이나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친정 부친 심온과 숙부 심정이 사형당하고 자신은 겨우 쫓겨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생모 안씨가 의정부의 여종으로 있는 모욕을 견뎌야 했다.
조선 개국 초의 선비들은 집안에서 미래의 왕비, 즉 세자빈이 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지체가 낮은 집안사람이 지체 높은 집안과 혼인하여 행세하는 것을 ‘치마양반’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왕가에 시집 보내는 것을 영광이 아니라 권력과 재물을 탐해서 딸을 판 치마양반으로 부끄럽게 여겼던 선비정신이었다. 조선 후기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이 세자빈은 반드시 서인가에서 낸다는 ‘국혼물실’(國婚勿失)을 쿠데타 이념으로 삼기 전까지는 왕비 자리가 정쟁의 대상이 된 적은 별로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왕비 자리가 정쟁의 대상이 되어 나라가 크게 혼탁해졌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도 아직 대통령 부인에 대한 법적인 지위와 그 역할이 분명하지 못하다. 문재인 정권 때 한 신문이 그 부인을 여사(女史)가 아닌 씨(氏)라고 지칭했다고 물의가 인 적이 있었다. 여사(女史)는 ‘주례(周禮) 중 천관(天官)’에 나오는 관직명으로 모두 여덟 명이다. 왕후의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돕고 왕비가 내정을 다스리는 것을 돕는 직책이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는 여사를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 또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통령 부인이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는 왕조 시대의 유산인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직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공화국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2 부속실을 두네 마네 하는 지엽적 해법 보다는 대통령 부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로 보인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이는 조선 왕비들의 운명이 그다지 순탄치 못했음을 말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친동생 넷이 모두 사형당하는 비극을 목도해야 했던 것이나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친정 부친 심온과 숙부 심정이 사형당하고 자신은 겨우 쫓겨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생모 안씨가 의정부의 여종으로 있는 모욕을 견뎌야 했다.
조선 개국 초의 선비들은 집안에서 미래의 왕비, 즉 세자빈이 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지체가 낮은 집안사람이 지체 높은 집안과 혼인하여 행세하는 것을 ‘치마양반’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왕가에 시집 보내는 것을 영광이 아니라 권력과 재물을 탐해서 딸을 판 치마양반으로 부끄럽게 여겼던 선비정신이었다. 조선 후기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이 세자빈은 반드시 서인가에서 낸다는 ‘국혼물실’(國婚勿失)을 쿠데타 이념으로 삼기 전까지는 왕비 자리가 정쟁의 대상이 된 적은 별로 없었다. 인조반정 이후 왕비 자리가 정쟁의 대상이 되어 나라가 크게 혼탁해졌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도 아직 대통령 부인에 대한 법적인 지위와 그 역할이 분명하지 못하다. 문재인 정권 때 한 신문이 그 부인을 여사(女史)가 아닌 씨(氏)라고 지칭했다고 물의가 인 적이 있었다. 여사(女史)는 ‘주례(周禮) 중 천관(天官)’에 나오는 관직명으로 모두 여덟 명이다. 왕후의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돕고 왕비가 내정을 다스리는 것을 돕는 직책이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는 여사를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 또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통령 부인이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는 왕조 시대의 유산인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직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공화국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2 부속실을 두네 마네 하는 지엽적 해법 보다는 대통령 부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로 보인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