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 지역 우리 식물] 오동나무라는 이름의 섬, 오동도
2022년 05월 12일(목) 02:00 가가
매년 10월이 되면 전 세계 뉴스에 등장하는 식물이 있다. 호주 등지에서 보라색 꽃을 피우는 나무, 자카란다. 이 식물은 보편적인 꽃 색인 흰색, 노란색, 분홍색이 아닌 형광빛의 이색적인 보라색 꽃을 피우는데다 이 꽃이 도시 전체를 보랏빛으로 화려하게 물들인다.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나무에 열광한다.
물론 자카란다는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후가 맞지 않아 실내에서만 재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노지에서 정원수로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아쉬울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자카란다만큼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피우는 오동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오월이 되면 구도심과 주택 단지 혹은 마을 등지에서 오동나무가 보라색 꽃을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예로부터 마을 어귀에 많이 심어지는 나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사는 지역은 최근에 조성된 신도시인지라 오동나무를 볼 수 없다. 아무래도 최근에는 오동나무가 조경수로 많이 심어지지 않는 듯하다.
사실 나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튀는 색이라는 인상 때문에 보라색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물을 공부하고 자연이 만들어낸 은은한 보랏빛 꽃들을 관찰하며,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비꽃, 솔체꽃, 층꽃나무…. 특히 오동나무의 꽃색은 보라색과 회색 그 경계에서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절제된 화려함을 가졌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아는 오동나무는 대부분 참오동나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동나무와 참오동나무를 볼 수 있는데, 오동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고 참오동나무는 동북아를 아우른다. 둘의 결정적 형태 차이는 꽃 안에 자주색 점선의 유무다. 참오동나무는 점선이 있고, 오동나무는 선이 없다. 오래 전부터 마을 어귀에 많이 심어진 종은 정확히는 꽃에 자주색 점선이 있는 참오동나무다.
오동나무는 특별한 장소를 떠올리게도 한다. 나에게는 여수가 고향인 친구가 있다. 우리는 대학교에서 만났고,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여수로 내려간 후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또 친구의 아이를 보기 위해 여러 번 여수를 찾았다. 매번 친구는 내게 여수의 식물 장소를 소개해 주었고, 때마다 그는 나를 오동도로 데려갔다. 친구는 육지와 오동도를 잇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나와 함께가 아니면 오동도에 잘 가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존재, 장소일수록 소홀하기 마련이다. 신도시로 이사를 가서야 비로소 오동나무를 찾게 된 나처럼 말이다.
오동도에는 동백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러나 이 섬의 이름, 오동도는 의외로 오동나무에서 유래했다. 작년 내부 순환도로를 지나다가 터널 입구의 오동나무를 보고 문득 오동도 이름이 떠올랐고, 이 나무와 섬 둘의 이름이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오동도에 오동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섬이 오동도로 이름 붙은 연유는 두 가지 이야기로 알려진다. 하나는 하늘에서 본 섬 모양이 오동나무의 잎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원래 이 섬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말 이곳에 오동나무 열매를 따먹으려 봉황이 날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공민왕이 오동나무를 베어 버리라 명했다고도 한다. 봉황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 지역 출신의 이가 후대 왕이 된다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름이란 것은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 같다. 신종 식물 명명을 위해 고민하는 동료 식물학자를 보면서도 매번 생각한다. 식물명이든 사람의 이름이든 또 지명이든 모든 것은 이름으로서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기억된다는 말이다. 오동나무가 무성했던 섬 오동도. 지금 이곳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나는 오동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보랏빛 꽃이 무성히 피었던 그 언젠가의 오동도를 상상할 수 있다.
<식물 세밀화가>
오월이 되면 구도심과 주택 단지 혹은 마을 등지에서 오동나무가 보라색 꽃을 만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예로부터 마을 어귀에 많이 심어지는 나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사는 지역은 최근에 조성된 신도시인지라 오동나무를 볼 수 없다. 아무래도 최근에는 오동나무가 조경수로 많이 심어지지 않는 듯하다.
오동나무는 특별한 장소를 떠올리게도 한다. 나에게는 여수가 고향인 친구가 있다. 우리는 대학교에서 만났고,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여수로 내려간 후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또 친구의 아이를 보기 위해 여러 번 여수를 찾았다. 매번 친구는 내게 여수의 식물 장소를 소개해 주었고, 때마다 그는 나를 오동도로 데려갔다. 친구는 육지와 오동도를 잇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나와 함께가 아니면 오동도에 잘 가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존재, 장소일수록 소홀하기 마련이다. 신도시로 이사를 가서야 비로소 오동나무를 찾게 된 나처럼 말이다.
오동도에는 동백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러나 이 섬의 이름, 오동도는 의외로 오동나무에서 유래했다. 작년 내부 순환도로를 지나다가 터널 입구의 오동나무를 보고 문득 오동도 이름이 떠올랐고, 이 나무와 섬 둘의 이름이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오동도에 오동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섬이 오동도로 이름 붙은 연유는 두 가지 이야기로 알려진다. 하나는 하늘에서 본 섬 모양이 오동나무의 잎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원래 이 섬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말 이곳에 오동나무 열매를 따먹으려 봉황이 날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공민왕이 오동나무를 베어 버리라 명했다고도 한다. 봉황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 지역 출신의 이가 후대 왕이 된다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름이란 것은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 같다. 신종 식물 명명을 위해 고민하는 동료 식물학자를 보면서도 매번 생각한다. 식물명이든 사람의 이름이든 또 지명이든 모든 것은 이름으로서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기억된다는 말이다. 오동나무가 무성했던 섬 오동도. 지금 이곳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나는 오동도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보랏빛 꽃이 무성히 피었던 그 언젠가의 오동도를 상상할 수 있다.
<식물 세밀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