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면仰亭)의 가마꾼 이야기-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2022년 04월 25일(월) 02:00 가가
광주의 무등산, 무등산의 계곡 중에서 원효계곡이야말로 시와 술과 풍류가 있었고, 성리학의 철학에 의병 정신이 함양된 의혼(義魂)의 골짜기다. 수많은 누정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면앙정과 식영정, 소쇄원의 아름다운 경관과 그곳을 출입했던 학자·문인들의 시문학과 학문은 조선 사림 문화의 최고봉에 이르렀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문화사의 정통적 평가이다. 그렇게 훌륭한 경관이 세상 어디에 또 있으며, 국가를 대표하던 학자와 문인들이 그곳에 모여 계산풍류(溪山風流)의 고급 풍류 문화를 창조해 냈음은 신기할 정도로 우수했다.
나는 1980년대 중반, 호남 학술과 문화를 탐색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원효계곡의 위대함에 넋을 잃고 그곳을 헤매며, 그곳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다. 그 결과물이 나의 첫 저서 ‘다산기행’(茶山記行, 1988 한길사)에 ‘무등산의 풍류와 의혼’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 글에서 그곳 누정에 모여들던 당대의 학자나 문인들의 면모가 기록되어 있고 그들이 이룩한 사림문화가 어떻게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의병 운동으로 승화했던가의 연유를 나름대로 밝혀보기도 했다. 그곳을 출입하던 학자·문인들 중에서 대표적인 김천일·고경명·김덕령 등의 의병 운동은 호남에 정의를 위해 몸을 바치는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숭고한 애국심을 발휘하던 전통이 수립되게 했던 위대한 공이 있다.
며칠 전에 동아일보 기자 출신 황호택·이광표 두 문사들이 펴낸 ‘대나무숲 담양을 거닐다’(2022, 컬처룩)라는 책을 받았다. ‘문향·예향·의향’이라는 부제를 달고 담양군의 역사와 전통, 시문학과 학술, 대나무숲과 대나무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을 열거한, 그야말로 담양의 속살까지를 모두 보여주는 값진 책이다. 그 책은 원효계곡의 가사문학을 깊이 천착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정문화의 이야기는 자세하여 읽어 볼 가치가 큰 책이다. 그 책에서도 유독 면앙정의 사림문화의 높은 경지를 극찬하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나도 큰 차이 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터여서 그 정자에 대한 이야기를 부연해 보련다.
‘면앙정가’로 세상에 유명한 송순(宋純,1493∼1583)은 담양에서 태어나 담양에서 생을 마감한 호남의 대표적인 문신(文臣)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50여 년 관료 생활을 했지만 1533년 권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자 바로 귀향하여 정자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시와 시조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원효계곡의 끝자락에 위치한 면앙정은 송순의 학덕에 문학가의 재능까지 합해져 누정의 최고봉에 이르게 되었다. 송순이 면앙정 정자를 중심으로 교류했던 당대의 학자나 문인들을 보면, 그 정자의 가치와 고귀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금방 알게 된다. ‘면앙정’이라는 편액부터 고급이다. 학자이자 명필이던 청송 성수침의 글씨였으니 더 할 말이 없다.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 조선의 최고 학자의 시가 걸려 있고,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 백호 임제의 ‘면앙정부’, 제봉 고경명과 석천 임억령의 ‘면앙정 30영’, 동악 이안눌과 양곡 소세양, 소쇄원 양산보의 시를 각한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조선의 대표적 학자와 문인들이 총망라된 으뜸 정자임을 넉넉히 알게 된다.
송순은 복이 많은 분이어서 91세라는 장수를 누렸고, 벼슬도 판서에 오른 고관이어서 만인의 추앙을 받았던 분이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87세에 회방(回榜)을 맞아 문인과 제자들이 모두 모이고 임금도 하사품을 내렸고 전라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목사·군수·현령·현감 등 인근의 벼슬아치들이 함께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를 마치고 송순이 정자에서 내려오자, 당대의 명인들인 박순, 정철, 이후백, 임제 네 분이 손으로 가마를 만들어 송순을 메고 내려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이른바 ‘하여면앙정(荷輿면仰亭)’이라는 용어가 그래서 탄생했다. 박순, 정철은 정승에 오른 분들이요, 이후백은 이조판서, 임제는 천하의 시인이었다. 그들이 가마꾼이 되어 어른을 모셨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던가.
송순이 타계한 지 215년째이던 정조 22년(1798년) 전라도에 도과(道科)를 실시하자, 정조가 내린 글제가 바로 ‘하여면앙정’이었다. 한말 대문호 영재 이건창은 면앙정을 방문하여 천하에 유명한 시 한수를 읊었다.
“송공의 명덕을 생각케 하니 / 향국(鄕國)의 풍류가 한시대에 풍성했네 / 정자는 의연하게 강위에 있는데 / 가마꾼 그 인물들 세상에 우뚝했소 / … 쳐다보고 굽어보다가 부질없이 서글퍼짐은 / 오늘은 누가 내 가마 메주고 나는 또 누굴 메줄꼬.”
송순의 위대함을 그렇게 멋지게 노래 불렀다.
송순은 복이 많은 분이어서 91세라는 장수를 누렸고, 벼슬도 판서에 오른 고관이어서 만인의 추앙을 받았던 분이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87세에 회방(回榜)을 맞아 문인과 제자들이 모두 모이고 임금도 하사품을 내렸고 전라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목사·군수·현령·현감 등 인근의 벼슬아치들이 함께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를 마치고 송순이 정자에서 내려오자, 당대의 명인들인 박순, 정철, 이후백, 임제 네 분이 손으로 가마를 만들어 송순을 메고 내려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이른바 ‘하여면앙정(荷輿면仰亭)’이라는 용어가 그래서 탄생했다. 박순, 정철은 정승에 오른 분들이요, 이후백은 이조판서, 임제는 천하의 시인이었다. 그들이 가마꾼이 되어 어른을 모셨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던가.
송순이 타계한 지 215년째이던 정조 22년(1798년) 전라도에 도과(道科)를 실시하자, 정조가 내린 글제가 바로 ‘하여면앙정’이었다. 한말 대문호 영재 이건창은 면앙정을 방문하여 천하에 유명한 시 한수를 읊었다.
“송공의 명덕을 생각케 하니 / 향국(鄕國)의 풍류가 한시대에 풍성했네 / 정자는 의연하게 강위에 있는데 / 가마꾼 그 인물들 세상에 우뚝했소 / … 쳐다보고 굽어보다가 부질없이 서글퍼짐은 / 오늘은 누가 내 가마 메주고 나는 또 누굴 메줄꼬.”
송순의 위대함을 그렇게 멋지게 노래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