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의 죽음과 절멸
2022년 04월 13일(수) 23:00 가가
지난달 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19 감염에 의한 폐렴 증상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 안 돼 일어난 일이다.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셨다는 전화를 받았고 몇 분 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97세의 연세인지라 친인척 모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덜하진 않았다. 우리는 슬퍼할 새 없이 곧바로 장례식장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많아 시내 장례식장이 꽉 찬 상태였다. 화장터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시 외곽의 장례식장을 겨우 구해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동시에 몇 달 전부터 내 목에 작은 멍울이 잡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동네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멍울을 이리저리 만지시더니 소견서를 써 줄 테니 대학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검사를 받고 일주일간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히 악성이 아닌 양성 종양이란 결과가 나왔고, 경과를 지켜본 후 수술을 하기로 했다.
지난달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의 건강 문제로 병원을 다니면서 부쩍 죽음에 관한 생각이 잦아졌다.
그동안 나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이에 관해 주변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생물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걸 알면서도 막상 나와는 먼 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죽음, 내 건강에 대한 염려 그리고 장례식과 화장을 치를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아가는 현재 상황을 지켜보며 지난 한 달간 내 머릿속은 죽음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강원도에서 난 대형 산불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 뉴스를 볼 때면 피어나는 봄꽃의 존재가 잊힐 만큼 현실이 참혹하게 느껴졌다.
죽음은 모든 생물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물이 물체와 다른 점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삶 끝의 죽음은 생물의 특권이자 정체성이다. 어쩌면 죽음이 생물이란 존재를 더욱 고귀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일 뿐, 나는 여전히 죽음이 낯설다.
동물이 아닌 식물에게도 죽음은 있다.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거나 태풍에 뿌리째 뽑히는 개체 하나하나의 죽음도 있고, 한 종의 식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절멸도 있다. 절멸은 지구상에 한 종의 생물이 아주 없어지는 일이다.
절멸은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나도 막막한 일이라 우리와는 먼 일 같지만, 1900년 이후 지구에서는 매년 세 종의 식물이 절멸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멸종보다 수백 배 빠른 속도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기록이 있는 나도풍란과 다시마고사리삼, 그리고 무등풀, 벌레먹이말, 줄석송…. 이 식물들은 더 이상 야생에서 볼 수 없는 절멸 식물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것은 이것이 되돌릴 수 없고, 후회와 슬픔만 가득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절멸은 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고, 또 누군가에는 못다 한 행동에 대한 후회다. 1938년 광주 무등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무등풀이라 명명된 식물을 나는 앞으로도 산에서 볼일 없고, 그림 그릴 수 없다.
시기가 각자 다를 뿐 모든 생물은 죽는다. 그런 죽음을 앞두고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병원 검진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간 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야 했다. 혹여나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금 그리고 있는 식물들, 나를 믿고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 그리고 나의 가족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나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 아닌 늘 하던 일을 하고, 가까운 이들과 일상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온몸의 에너지를 꽃봉오리에 쏟아 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역시 이미 절멸한 식물이나 산불과 전쟁에 사라져가는 풀들과 마찬가지로 한 종의 생물, 하나의 개체일 뿐임을 실감하는 날들이다. <식물세밀화가>
죽음은 모든 생물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물이 물체와 다른 점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삶 끝의 죽음은 생물의 특권이자 정체성이다. 어쩌면 죽음이 생물이란 존재를 더욱 고귀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일 뿐, 나는 여전히 죽음이 낯설다.
동물이 아닌 식물에게도 죽음은 있다.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거나 태풍에 뿌리째 뽑히는 개체 하나하나의 죽음도 있고, 한 종의 식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절멸도 있다. 절멸은 지구상에 한 종의 생물이 아주 없어지는 일이다.
절멸은 그 이름만으로도 너무나도 막막한 일이라 우리와는 먼 일 같지만, 1900년 이후 지구에서는 매년 세 종의 식물이 절멸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멸종보다 수백 배 빠른 속도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기록이 있는 나도풍란과 다시마고사리삼, 그리고 무등풀, 벌레먹이말, 줄석송…. 이 식물들은 더 이상 야생에서 볼 수 없는 절멸 식물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것은 이것이 되돌릴 수 없고, 후회와 슬픔만 가득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절멸은 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고, 또 누군가에는 못다 한 행동에 대한 후회다. 1938년 광주 무등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무등풀이라 명명된 식물을 나는 앞으로도 산에서 볼일 없고, 그림 그릴 수 없다.
시기가 각자 다를 뿐 모든 생물은 죽는다. 그런 죽음을 앞두고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병원 검진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간 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야 했다. 혹여나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지금 그리고 있는 식물들, 나를 믿고 일을 맡긴 클라이언트, 그리고 나의 가족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나는 어떤 특별한 경험이 아닌 늘 하던 일을 하고, 가까운 이들과 일상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온몸의 에너지를 꽃봉오리에 쏟아 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역시 이미 절멸한 식물이나 산불과 전쟁에 사라져가는 풀들과 마찬가지로 한 종의 생물, 하나의 개체일 뿐임을 실감하는 날들이다. <식물세밀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