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빛’-이병열 4·19민주혁명기념사업회장
2022년 04월 13일(수) 22:30
4·19 민주혁명 제62주년을 맞아 지방 유일의 광주 4·19민주혁명 역사관 1층 현관에 게시된 작품 ‘4·19 혁명의 빛’을 보며 4·19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4·19 혁명의 빛’은 우제길 화백이 4·19 혁명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역사관에 기증한 150호 크기의 그림이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100인에 선정된 우 화백의 작품은 1960년 4·19 당시 암흑 세상을 빛으로 밝히기 위해 수만의 학생들이 “독재 정권 타도, 부정 선거 규탄”을 외치며 광주 도청 앞 광장으로 운집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4·19 민주혁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민주화의 초석을 다진 위대한 민주화의 역사이다.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더불어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이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4·19 혁명의 직접적 발발 원인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를 사전 대리 투표와 3인조·5인조 반공개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갖은 부정으로 국민 주권과 참정권을 박탈한 데서 비롯된다.

광주에서는 3월 15일 낮 12시 40분경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민주당 선거 참관인이 철수하며 선거 포기 선언을 하고, 당원과 시민·학생들이 “민주주의는 죽었다”며 ‘곡 민주주의 장송 데모’을 벌이다 진압 경찰과 충돌했다. 이로부터 세 시간 뒤 마산에서 1차 시위가, 6시경에는 마산 학생 데모대와 경찰 간 마찰로 열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행방불명된 김주열 학생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전국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광주의 4·19 혁명은 자유당 독재 정권과 부정 선거에 항거하기 위해 4월 18일 광주고생 하숙집에 광주고생과 조대부고생들이 모여 봉기를 모의한 데서 시작된다. 이 자리에서 4월 19일 광고생이 먼저 봉기키로 했으나 정보가 경찰에 새 나가는 바람에 당일 아침 등교와 동시에 모의 참가자들과 반장들이 교장실에 불려 가 감금됐다.

하지만 2교시가 시작된 10시 20분경 난타 종소리 직후 3학년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고 이어 1·2학년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난타 종소리가 광주 4·19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정원채 학생은 필자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2교시 시작과 동시에 사전에 열어 놓은 뒷문으로 종을 치러 나갔으나 종 치는 나무 망치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워커를 벗어 종을 난타했다.

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은 각 고등학교를 방문해 광고생들의 봉기 사실을 알려 동참을 호소하기로 하고 교문을 향해 달려갔다. 철제 교문은 굳게 닫혀 있고 밖에선 경찰과 선생님들이 막고 있었다. 선봉에 선 학생들이 경찰과 승강이를 할 때 일부 학생은 후문으로 달려갔다. 승강이를 하던 학생들도 교문을 무너뜨리고 도로로 나왔다. 광주 4·19의 서막이 오르며 혁명의 빛이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문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은 계림동 오거리 방향으로 달려갔으나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대열이 무너지며 일부는 경찰에 붙들려 갔다. 나머지 학생들은 전남여고·광주여고·공고·조대부고·숭일고·수피아여고로 달려가 봉기 사실을 소리쳐 알리며 동참을 호소했다. 오후 2~3시경 광고·부고·상고·숭일고·광주여고·농고·광주사범·일고·수피아·전남여고 학생 수만 명이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충장로에 몰려 들면서 혁명의 불꽃이 타올랐다. 경찰이 소방차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키려 하자 피 끓는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대항했다.

오후 5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지만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후 8시경 학동파출소에 대한 투석 중 경찰의 실탄 발포로 학생이 쓰러졌다. 광주 4·19 최초 희생자인 강정섭 학생이다. 시위대는 밤 9시경 광주경찰서로 이동해 저항하려 했지만 경찰의 최루탄·공포탄 발포에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9시 20분경에는 경찰 돌격대가 나와 실탄을 발포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때마침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시위대는 산산이 분열되었다. 광주 4·19 민주혁명 당시 사망자는 여덟 명(경찰 한 명), 부상자 59명으로 역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이후 시위는 계엄령 하에서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무너지며 제2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4·19 혁명의 빛은 위대한 민주주의를 밝혀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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