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의 창] 누구를 찍어야 하나
2022년 03월 03일(목) 00:30
몇 년 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찾아가 본 적이 있다. 토교 지요다구의 일왕이 사는 왕거(王居) 북쪽에 총면적 93,356㎡, 약 3만1천 평의 거대한 신사다. 땅값 비싼 도쿄에 이런 신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신사’(war shrine)라고 부르는 것처럼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1854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미국의 폐리제독에 의해 개항하자 반막부 세력이 일왕에게 정치를 돌린다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막부와 충돌하는 무진전쟁(戊辰戰爭:1868~1869)이 일어났다. 반막부파가 승리한 후 일왕 메이지(明治)가 자신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신사 건립을 명령해서 1869년 ‘도쿄 쇼콘자’(東京招魂社)가 세워졌다. 10년 후 메이지가 ‘야스쿠니’(靖國)라는 이름을 하사했는데, 어지러운 나라를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야스쿠니 신사가 국제적 문젯거리로 떠오른 것은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을 합사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했던 동경국제재판은 731부대 책임자들도 처벌하지 않았던 솜방망이 재판으로서 불과 7명만 교수형에 처해졌다. 진주만 습격의 책임자이자 수상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만주 및 중국 침략을 주도한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와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두 육군대장, 영국령 공격을 주도한 버마방면군 사령관 키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육군대장, 필리핀 민간인 학살과 포로 학대 혐의를 받은 14방면군 참모장 무토 아키라(武藤章) 등이었다.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 사령관 마쓰이(松井石根)는 남경학살 혐의였고, 히로다 코기(廣田弘毅)는 나치 독일과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하고 중일전쟁을 미리 알고 지지한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미국은 1948년 12월 23일 이들을 교수형시키고 유골을 도쿄만에 뿌렸는데,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한 코이소 쿠니아키(小磯國昭)의 변호인 산모지(三文字正平)가 유골 일부를 몰래 흥선사(興禪寺)로 빼돌렸다. 7명의 전범들의 유골은 옥사한 7인의 유골과 합쳐져서 야스쿠니에 합사되면서 야스쿠니가 전범 신사가 된 것이다. 필자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던 어스름 저녁에는 군복을 입은 백발노인이 일장기를 받들고 행군하고 손자인 듯한 아이가 뒤따르고 있었다. 한데 한동안 이 기괴한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본은 남의 나라를 침략하다가 사형당한 전범들에 대해 수상부터 국회의원들까지 추모가 그치지 않는 나라이다.

이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다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 우리의 ‘순국선열추모관’인데, 이런 추모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이 나라 정치인은 몇 퍼센트나 될까? 서대문 독립공원 한 귀퉁이에 ‘순국선열 현충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데, 179,45㎡로서 약 54평에 불과하다. 순국선열들은 최소 15만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신원이 확인된 2385위의 위패를 모셨다. 그나마 최근 신원이 확인된 480위는 위패 하나 모실 공간이 없어서 대기 중이다.

엊그제 3·1절을 맞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 및 백범 김구 주석 등의 무덤이 있는 서울 효창공원 내 의열사에서 ‘3·1 혁명의 함성 되살려 반민족, 매국의 역사학 끝장내자’는 연합 행사가 열렸다.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장은 순국선열 후손들이 처해 있는 참담한 현실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는 역사학자나 역사운동가들이 처해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순국선열유족회에 지원되는 국가 예산이 단 한 푼도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면 대한민국에 정부는 과연 존재하는지, 왜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빙으로 전개되는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지 고민하는 친지들을 만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그때 나는 말한다. 이 나라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사학을 확실히 해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후보를 뽑으라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순국선열들의 뜻을 받들겠다는 후보를 뽑으라고. 그런 후보가 있다면 말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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