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맹목에 대한 은유-심 옥 숙 인문지행 대표
2022년 02월 14일(월) 05:00
어느 날 갑자기 도시 전체에 ‘백색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퍼져서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단 한 가지 색으로, 오직 하얗게 보이는 전염병은 요즘 같은 때에는 상상조차 하기 두려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1922~2010)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야기는 도로 한 가운데서 일어난 어느 운전자의 실명으로 시작된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던 운전자는 갑자기 흰색으로 뒤덮인 시야에서 파란불을 볼 수 없게 된다. 한참 뒤에야 자신의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백색 실명의 황당함은 ‘홍채는 밝게 빛나고 공막은 하얗고 도자기처럼 단단해’ 보여서 실명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괴이한 질병은 온 도시에 퍼지고 사람들은 작가가 ‘우유의 바다’라고 표현하는 흰색 세상으로 내몰린다.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 도시 전체에 퍼진 백색 실명에 걸리지 않는다.

실명, 우유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한 도시의 상황은 세상에 대한 은유이자 풍자다. 실명한 상태지만 사실 제대로 보는 것도, 그렇다고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닌 채, 세상을 오직 한 가지의 색, 흰색으로만 보고 판단한다. 이런 상황을 소설적 환상으로만 간주할 수 없는 것은, 흰색이 지배하는 질병을 통해서 현실에 만연한 거대한 맹목성과 무지 속을 질주하는 광기에 대한 시선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전염병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머릿속에 빛이 있었으니까.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멀어버렸으니까.” 빛은 대상을 드러내는 조건이어서 대상을 가리는 다른 빛이 이미 머릿속에 가득하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 이야기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은유이자 소름 끼치는 현실의 초상이다. 이 소설에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름 대신 서로의 소리를 듣는 것이 서로를 만나는 방법이다.

눈먼 도시는 수용소 안과 밖으로 나뉜다. 정부는 정신병원을 수용소로 만든다. 무장한 군인들은 눈먼 자들을 감시하고 학대한다. 수용소 안의 눈먼 자들은 식량 약탈을 비롯한 온갖 흉악한 범죄를 자행하고 서로를 의심하며 증오한다. 수용소 밖에는 감시자들과 권력자들이 통제라고 부르는 냉소적인 권력놀이가 있을 뿐이다. 이 지독한 악몽의 유일한 목격자가 수용소로 가는 남편과 함께 가기 위해서 실명한 것처럼 위장한 안과 의사의 아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아내의 고백은 우리를 얼마나 두렵게 하는가. 혼자만 본다는 것, 이것은 실명한 모두가 눈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지만, 또한 처참한 불행과 저주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오롯이 안과 의사 아내의 판단과 행동에 달려 있고, 단 한 사람의 목격자라는 의미와 역할에 대한 인식에 따라서 달라진다.

안과 의사 아내는 실명한 집단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관계 중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잔인하고 가혹한 일을 자청하면서까지 스스로 모두의 ‘눈’이 되고, 다양한 사람들의 몸과 소리가 되어서 실명한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한다. 세상의 수많은 질병 중에서 가장 불행한 질병은 은유적 의미의 실명이기에,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우리는 더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눈뜬 자들의 도시만이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파국 너머로 향하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탁월함 가운데 최고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은유를 읽어 내는 능력 또한 최고의 탁월함 아닌가. 이 능력은 이미 들어와 있는 빛으로 인해 실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자신의 색에 예속시키지 않는 것이며, 상황의 뒤틀림을 읽는 것이다. 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연결하는 은유의 힘으로 내세운 이름 아래 가려진 것들을 보는 것이다. ‘가장 심하게 실명한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작가의 말에서 안과 의사 아내가 보는 것을 곧 삶으로 여긴 이유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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