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상실감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1년 11월 22일(월) 02:30 가가
누구나에게나 자신만의 특별함이 있다. 흔히 성격, 성향, 기질, 유전적 소질 등 다양한 표현으로 말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고유함은 곧 ‘나’를 구성하며 삶의 토대가 된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 특성에 맞는 삶을 원한다.
각자의 소질을 발전시키고 완성하고 싶어하는 것을 ‘자기실현 경향성’이라고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1902~1987)가 말한 용어다. 하지만 이런 경향성이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자기실현 경향성이 발현되는 현장인 세상이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의 조건을 억압하는 구조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가 차별적이거나 획일적인 조건들로 개인의 자기실현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모순된 상황과 경계가 동시에 작동하는 사회에서 자기실현 경향성이 제대로 발현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능력의 인정과 상호 신뢰 속에서 역할을 다할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만 자기실현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자기실현의 방법과 과정에서 불공정함을 느끼기도 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감정에 휩싸이며 좌절하기도 한다. 이 감정은 지금 당장의 모습과 능력만을 보고 무능과 열등함으로 평가된다는 불안을 일으킨다. 물론 이 정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아무도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언제나 ‘현실적 자기’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이상적 자기’의 두 모습으로 구성된다.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두 얼굴 모두 우리 자신의 모습이며, 이 현재와 이상의 차이에서 성취를 위한 의지와 노력의 원동력이 생성된다. 다만 이 원동력을 어떻게 사용하며, 그 방향의 선택이 어느 쪽인가 하는 문제가 결정적이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나와 나 사이’의 관계가 맹목적으로 충돌하며 상호 부정과 거부에서 오는 갈등을 크게 빚을수록 불안은 증폭된다. 불안은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정도를 넘어서 왜곡된 욕망을 부추기고 병적인 질주 징후로 나타날 때 우리의 모든 정서를 압도한다.
그런데 통제를 벗어난 불안을 조종하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숨어 있는 그림자다. 이 그림자는 현실 속 모습과 욕망된 ‘나’의 틈새에서 억눌린 분노와 원한, 실망과 열등감과 같은 숨어 있는 또 다른 나의 실체다. 숨은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일은 인간관계에서 크든 작든 자주 일어난다. 부모와 자녀, 좋은 친구 사이에서도 있지만 파괴적인 영향만을 끼치지는 않는다.
다만, 자칫 이상(理想)이 맹목적인 욕망으로 변질되고 망상과 현실의 경계가 뒤섞여서 무너지는 것이 문제다. 눈이 먼 욕망에는 방향성도 시간의 흐름도 없다. 숨은 그림자의 본질인 피해의식과 원한·분노·열등감 등을 정당화하는 과거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너는 운이 좋아서’ ‘인맥이 좋아서’ ‘때를 잘 만나서’ 등등을 쉽게 말한다.
자기실현 경향성이 건강성을 잃고 정도를 넘어서 폭주하는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왜곡과 부인이다. 왜곡은 거짓말·위조·조작 등이다. 이것들은 욕망과 현실을 일치시키게 하기 위한 부정의 수단이지만, 유독 우리 사회에서 흔한 왜곡 현상이다. 학력을 위조하고 경력을 속이는 정도는 수치스러울 것도 없는 듯하다. 여기에 동조하거나 추종하는 주변과 세를 규합하면서 왜곡된 자기실현의 욕망은 집단의 정체성으로 합리화된다. 그리고 시대가치의 수호자라는 자기망상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곳곳에서 깃발을 치켜들고 시대정신을 들먹이고 있지 않은가.
모든 종류의 맹신 중에서도 특히 맹목적 자기 확신이 가장 위험하다. 현실 상황과 진정한 자기실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인한 확신이며 원망의 반동이기 때문이다. 이 원한 감정을 철학의 영역으로 불러와, 그 뿌리가 노예근성에 있음을 역설한 사람이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간, 우연의 덫에 갇히지 않으며 바로 그러한 노예가 아닌 주인의 시간을 정오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억눌린 맹목적 분노가 만들어 낸 반동적인 확신은 감옥일 뿐이다. 진정한 자기실현을 가로 막는, 그래서 꼭 결별해야 할 ‘숨은 그림자’를 위한 은신처인 감옥을 스스로 만들지는 말자.
모순된 상황과 경계가 동시에 작동하는 사회에서 자기실현 경향성이 제대로 발현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능력의 인정과 상호 신뢰 속에서 역할을 다할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만 자기실현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자기실현의 방법과 과정에서 불공정함을 느끼기도 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감정에 휩싸이며 좌절하기도 한다. 이 감정은 지금 당장의 모습과 능력만을 보고 무능과 열등함으로 평가된다는 불안을 일으킨다. 물론 이 정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칫 이상(理想)이 맹목적인 욕망으로 변질되고 망상과 현실의 경계가 뒤섞여서 무너지는 것이 문제다. 눈이 먼 욕망에는 방향성도 시간의 흐름도 없다. 숨은 그림자의 본질인 피해의식과 원한·분노·열등감 등을 정당화하는 과거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너는 운이 좋아서’ ‘인맥이 좋아서’ ‘때를 잘 만나서’ 등등을 쉽게 말한다.
자기실현 경향성이 건강성을 잃고 정도를 넘어서 폭주하는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왜곡과 부인이다. 왜곡은 거짓말·위조·조작 등이다. 이것들은 욕망과 현실을 일치시키게 하기 위한 부정의 수단이지만, 유독 우리 사회에서 흔한 왜곡 현상이다. 학력을 위조하고 경력을 속이는 정도는 수치스러울 것도 없는 듯하다. 여기에 동조하거나 추종하는 주변과 세를 규합하면서 왜곡된 자기실현의 욕망은 집단의 정체성으로 합리화된다. 그리고 시대가치의 수호자라는 자기망상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곳곳에서 깃발을 치켜들고 시대정신을 들먹이고 있지 않은가.
모든 종류의 맹신 중에서도 특히 맹목적 자기 확신이 가장 위험하다. 현실 상황과 진정한 자기실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인한 확신이며 원망의 반동이기 때문이다. 이 원한 감정을 철학의 영역으로 불러와, 그 뿌리가 노예근성에 있음을 역설한 사람이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다.
그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시간, 우연의 덫에 갇히지 않으며 바로 그러한 노예가 아닌 주인의 시간을 정오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억눌린 맹목적 분노가 만들어 낸 반동적인 확신은 감옥일 뿐이다. 진정한 자기실현을 가로 막는, 그래서 꼭 결별해야 할 ‘숨은 그림자’를 위한 은신처인 감옥을 스스로 만들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