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의 상징 정무공(貞武公) 기건(奇虔)-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2021년 11월 08일(월) 04:00
‘월사집’(月沙集)은 조선의 대표적인 문장가 월사 이정귀(李廷龜)의 문집이다. 그 책을 펴 보니 ‘판중추부사 정무기공 신도비명’이라는 비문 한 편이 눈에 뜨인다. 청백리로서 지조를 철저하게 지켰던 정무공의 일생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글이다. 또한 1927년에 간행한 ‘장성읍지’(長城邑誌)라는 책을 읽어 보니 유림(儒林)편에 정무공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장성읍지에 인물로 등재된 분이면 장성과 관계가 깊은 분이라는 뜻일 텐데, 우리 전라도와도 무관한 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여러 곳에서도 정무공의 청렴한 행적을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

정무공의 이름은 건(虔)인데, 행주기씨(奇氏)다. 세종·단종 시절에 고관에 오른 벼슬아치이자 목민관으로 훌륭한 치적을 남겨 세상에 크게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묘비문이나 다른 글에도 탄생 연도나 태어나고 활동했던 고향 이야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장성의 인물 편에 기록되고, 전주부윤이나 제주목사 등의 벼슬을 했음이 밝혀졌으니, 전라도와 관계된 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장성과 광주 일대에는 명족인 행주 기씨들이 많이 거주하고 그 중에 학자·관인 등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 모두 정무공의 후손들이니 정무공은 전라도 인물로 여겨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장성의 추산사(秋山祠)에 배향된 인물이니 더 거론할 필요도 없겠다.

기건이 제주 안무사로 근무할 때 일인데 그가 매우 청렴한 목민관임을 알려 주는 일화가 있다. 제주에서는 전복이 생산되는데 그 채취 작업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노동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기건은 “백성들이 이와 같이 괴로움을 당하는데 내가 어찌 이것을 먹으리오”라고 하고는 일절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큰 고통을 덜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목민심서와 신도비명 그리고 장성읍지 등 모든 곳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매우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이다.

‘목민심서’에 제주의 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그냥 구렁텅이에 넣어 버렸는데, 기건이 제주목사가 되어 사람이 죽으면 관(棺)을 갖추어 염(斂)을 하고 예법에 맞게 장사 지내는 법을 가르쳐서 그 뒤로는 그렇게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도비명이나 장성읍지에도 그대로 나온다.

이런 일화도 있다. 기건이 연안부사 시절 이야기다. 붕어를 키우는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아 관에 바치는 풍속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건은 그 일을 중단하게 했다. “어찌 입과 배 때문에 염치를 손상케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붕어를 먹지도 않고 바치지도 않도록 해서 백성들이 그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먹고 싶다고 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염치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굳은 뜻을 지녔던 기건은 마침내 청백리에 기록되었다. 판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고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신도비에 나오는 이야기는 더 멋지다. 세종에 이어 문종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단종이 임금에 올랐다. 세조가 조카를 쫓아내고 죽이며 왕위에 올랐다. 이에 분개한 기건은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은거하며 지조를 지킨 절신(節臣)이 되었다.

세조가 임금에 오른 뒤 몇 차례 그를 방문하여 벼슬에 오르게 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했다. 이유는 눈이 실명하여 벼슬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멀쩡한 눈이 보이지 않는 청맹(靑盲:달걀봉사)이라는 핑계를 댄 것이다. 세조가 바늘로 눈을 찌르는 행동을 했으나, 끝까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청맹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결국 벼슬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뒷날 아무런 화를 당하지 않아 모두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했다.

정무(貞武)라는 시호는 아무에게나 내리는 시호가 아니다. 청백수절(淸白守節)함이 정(貞)이요 강강직리(剛强直理:강직하고 곧음)해야 무(武)라고 말하며, 탁월한 인품의 소유자에게만 내린다고 하였다. 신도비문에서 이정귀는 그가 청백리이며 절개가 굳은 인물이어서 후손들이 학자로, 벼슬로, 지조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 많았다고 하면서 기씨 가문의 성대함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기건의 손자 복재 기준(奇遵)은 기묘명현으로 조광조 등과 뜻을 같이한 현인이었다. 증손 고봉 기대승은 대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기준의 아들 대항(大恒)은 판윤 벼슬에, 그의 아들 기자헌(奇自獻)은 영의정에 오른 정치가로 큰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뒷날 조선 후기 노사 기정진이 조선 성리학자 6대가 중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로써 기건의 후손들 중에는 참으로 큰 인물이 많았음을 알게 된다. 관인으로서 청백과 강직, 의리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지조, 그런 위대한 정신은 호남의 의리(義理) 정신을 살지게 했던 원천이었음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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