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2021년 07월 19일(월) 01:30
프랑스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 뒤섞여 낮도 밤도 아닌 모호한 경계의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원래 해질녘을 의미하는 프랑스어(L‘heure entre chien et loup)를 우리말로 그렇게 번역했다. 저 언덕 너머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짐승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양한 분야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동이 틀 무렵 어둠과 새벽빛이 혼재된 때도 그와 같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한다.

지난 2007년 방송된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범죄 조직에 잠입한 정보원의 이야기를 다뤘다. 한·중·일 550만 네티즌이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했을 만큼 작품성과 흥행 면에서 인정을 받았다. 암흑세계에 뛰어든 정보원이 범죄 조직의 딸을 사랑하게 되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운명의 딜레마는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정부의 잇단 규제에도 아파트값이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 ‘벼락 거지’ 같은 말이 생겨날 만큼 부동산은 핫이슈로 부상했다. 정부 부처 수장들이 아파트값 하락 가능성을 경고하며 신중한 매수를 당부했지만, 상승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꼭짓점일지 혹은 최저점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더 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접어든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비수도권까지 거리 두기가 격상됐다. 활동량이 많은 젊은 층 감염이 급증한 데다 델타 변이가 광범위하게 퍼진 탓이다. 사실상 코로나 청정지역은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도,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 중 누가 감염자인지 알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살고 있는 셈이다.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는 저서 ‘개와 늑대들의 정치학’에서 대통령 선거를 ‘개와 늑대들의 시간’으로 규정한 바 있다. 물론 검증을 거치다 보면 후보자들의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향후 잠룡들의 경쟁은 결국 ‘개’와 ‘늑대’ 중 한 사람을 뽑는 결과로 귀착될 것이지만. 바야흐로 사랑도, 아파트도, 코로나도, 선거도, 아니 모든 일상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얽혀 있는 셈이다. 누가 ‘개’이고 누가 ‘늑대’인가?

/박성천 문화부 부장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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