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비둘기
2021년 05월 31일(월) 05:00 가가
요즘 고위 공무원이나 유력 정치인들의 고사성어(故事成語) 사용이 크게 늘었다. 복잡미묘한 상황을 단 몇 글자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한데 최근엔 다소 어려운 고사성어가 부쩍 많이 등장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는 지난 2월 여당이 제시한 4차 재난지원금 지급 범위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지지지지’(知止止止)라는 말을 썼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데 ‘그침을 알고, 그칠 데 그친다’는 뜻이다. 하지만 웬만큼 학식 있는 이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말이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올해 신축년 사자성어로 ‘원견명찰’(遠見明察)을 꼽았다. ‘멀리 보고 밝게 살핀다’는 의미이지만, 역시 20~30대 청년층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단번에 알아듣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재명 경기 지사는 지난 4월 ‘공정 벌금’을 둘러싸고 국민의힘 측과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삭족적리’(削足適履)라는 고사성어를 사용했다.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춘다’는 의미로 ‘불합리한 방법을 억지로 적용하는 것’을 지적할 때 사용되곤 하는 말이다. 하지만 추가 설명이 없다면 알아듣기 어려운 성어다.
유력 정치인이나 고위 관리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고사성어를 사용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일 터. 따라서 ‘좋다’ 혹은 ‘나쁘다’ 같은 가치 판단을 내릴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신예 대 중진’ 간 마찰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고사성어가 신조어에 익숙한 젊은 층에 낯설어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정세균 전 총리가 말한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엄격한 차례가 있음)나 홍준표 의원의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 어린 비둘기는 험한 고개를 넘지 못한다)이 양 세력 간 갈등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생각은 단어로 이루어진다. 서로에게 낯설거나 상대가 기피하는 단어로 생각하고 말하다 보면 결국엔 또 다른 사회적 갈등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중진과 신예 모두 건전한 세대 경쟁에 나서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홍행기 정치부장 redplane@kwangju.co.kr
생각은 단어로 이루어진다. 서로에게 낯설거나 상대가 기피하는 단어로 생각하고 말하다 보면 결국엔 또 다른 사회적 갈등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중진과 신예 모두 건전한 세대 경쟁에 나서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홍행기 정치부장 redplane@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