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향수의 시인
2020년 07월 06일(월) 00:00
<3> 충북 옥천 정지용 문학관

충북 옥천군에 자리한 정지용문학관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던 시인의 문학적 혼과 생애가 응결된 의미있는 공간이다.

정지용 시인(1902~1950)의 ‘향수’는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시다. 그를 모르는 이들도 이동원과 박인수가 불렀던 ‘향수’라는 노래는 안다. 이동원의 중저음과 박인수의 시원한 고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노래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정지용은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주도한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다. ‘문장’지 추천위원으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청록파 시인을 발굴하기도 했다. ‘시문학’과 ‘문장’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동인이자 문예지다. 그 자체로 한국문학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정점에 바로 정지용 시인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문학을 잉태한 그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다. 장마철 특유의 날씨는 흐릿하면서도 후텁지근하다. 귓가를 스치며 환청처럼 들려오는 ‘향수’는 눈앞에 황금빛 들녘을 펼쳐낸다. 회화적이며 이미지적인 시골 풍경은 마음을 다사롭게 어루만진다.

‘향수’와 정지용 시인을 모티브로 한 회화.
그림 같은 노랫말에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초록이 무성한 산하가 뒤로 뒤로 밀려난다. 그것과 비례해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도 뒷걸음질 친다.

필자의 마음에도 오래전 사라져버린 고향의 풍경이 살포시 들어와 자리한다. 여름이면 팔랑거리며 흘러가던 강물과 비라도 내리면 비릿하게 코끝을 적시던 원초적인 냄새가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정지용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서울에서 충청도와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예로부터 사람의 왕래와 물산의 교류가 활발했다. 빛고을 광주에서 옥천까지는 넉넉잡고 세 시간 남짓 거리다. 옥 같이 맑은 내가 흐르는 이미지는 수채화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소리 내 읽을수록 그 맛이 우려낸 찻물 같다. 절제된 시어와 감각적인 언어가 주는 묘미는 절창이다.

옥천은 우암 송시열, 중봉 조헌, 충신 김문기의 고향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는 것은 이면에 중심부로 부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또한 옥천은 육영수 여사(박근혜 전 대통령 어머니)의 고향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지용 생가와 멀지 않은 곳에 육 여사의 생가가 있다.

옥천이라는 고장이 발하는 이미지는 이렇듯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의 고장이면서 대통령 영부인을 배출한 고장은 결이 다른 아우라를 발한다. 이 고장의 산세와 지형과 무관치 않을 터다. 눈을 둘러보아도 굽이굽이 옥천(玉川)인 게다. 시인을 키워낸 흙과 물은 다함없이 기름지고 맑을 터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베개를 돋아 고이 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중에서>



전시실에 걸린 고향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
정지용이 감각적으로 빚어낸 시어는 옥천의 풍광을 닮았다. 기교를 초월하는 표현의 이채로움은 그의 시가 지닌 매력이다. 정밀하면서도 질박한, 그러면서도 우아와 범박을 아우르는 지고의 세계는 여느 시인의 그것과 확연히 갈린다. 어쩌면 노력이나 열정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생득적인 감각의 결과물인지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문학관은 잠시 휴관 중이다. 취재차 들어가는 것도 못내 망설여지는 요즘이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시인의 모습을 한 조형물이 이편을 맞는다. 예술가와 학자풍의 이미지가 작품 세계와 절묘하게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구 읍내에 자리한 정지용문학관은 지난 2005년 개관했다. 문학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문학교실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에는 테마별로 시인의 문학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비치돼 있다. 시인의 연보, 삶과 문학, 시집과 산문집 초간본 등이 눈에 띈다. 체험실에서는 영상시화, 시낭송 등 다양한 문학체험도 할 수 있다.

문학관 옆에 자리한 시인의 생가.
문학관 옆에는 시인의 소담한 생가가 자리한다. 옥천군은 문학관 옆 생가를 사들이기 위해 수차례 주민을 설득했다고 한다. 보상과 이주 등 지난한 과정이 있었지만 정지용을 옥천 브랜드로 만들기 위한 대승적 차원이 만든 결실이다.

군은 정지용이 지역을 넘어 한국 문학사의 브랜드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인식했다. 혹여 정지용을 모르는 사람도 시 ‘향수’를 애송한다는 것을 말이다. 일군의 평자들이 정지용의 시를 일컬어 우리말의 ‘보물창고’라고 말하는 이유와도 맥락이 닿는다.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울림과 감성, 철학 또한 결이 다르다.

문학관 앞에 자리한 포토존.
옥천군은 오는 10월 ‘옥천 지용제’를 개최한다.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문화의 고장 옥천을 국내외에 알리자는 취지다. 축제 기간에는 정지용문학상 시상식도 거행될 예정이다. 박두진, 김광균, 박정만, 오세영, 이성선, 유안진, 송수권, 정호승, 김종철, 강은교, 도종환 등 역대 수상자들의 면모만 봐도 지용문학상 위상이 어떠한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지용은 한때 ‘불온의 이름’이었다. 6·25 때 납북된 이후 그의 모습은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가 누락된 채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는 의미다.(알려진 바로는 1950년 9월께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1988년 해금조치가 단행되면서 그는 복권됐다. 다시 현대문학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우리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는 언제나 만나고 싶고 부르고 싶던 ‘향수(鄕愁)’ 그 자체였다. ‘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우리들 모두의 시인이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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