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투표소 가는 길에
2020년 04월 15일(수) 00:00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 선거가 임박하게 되면 정치권이 지지를 호소하거나 선거관리위원회가 투표를 독려할 때 내미는 단골 구호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슬로건도 빠지지 않는다. 선거와 투표가 지닌 가치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문구들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국민을 대표해 나랏일을 할 사람을 투표로 뽑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민은 자신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함으로써 사회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동안 선거가 우리 사회와 정치를 얼마만큼이나 나아지게 만들었는지 반추해 보면 회의감부터 든다. 대다수 국민은 정치를 통해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일부 정치꾼과 언론은 국민을 양극단으로 몰아가며 분열을 획책하고, 이에 따라 진보와 보수 진영 간 갈등은 커져만 간다. 타협과 공존이나 다양성은 사라지고 대결과 배제가 판을 친다. 기득권의 아성은 갈수록 견고해져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된 지 오래다. 대의 정치와 정당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치의 퇴행은 2016년 4·13 총선거로 출범한 20대 국회의 지난 4년을 되돌아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선거 결과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등으로 16년 만의 여소야대, 20년 만의 3당 체제가 형성됐다. 유권자들이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을 준엄하게 심판하며 정치권에 변화와 혁신을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20대 국회는 역대 최악의 ‘식물 국회’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겉으로는 상생과 협치를 내세우면서도 무한 정쟁으로 숱한 날을 지새웠다. 그래도 개원 직후엔 변화의 시늉이라도 했다. 국민적 요구인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정치발전특위를 구성한 것이다. 면책 특권과 세비 삭감, 선거 공천 방식 등 다양한 개혁 이슈가 논의됐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자정 역할을 해야 할 윤리특별위원회의 ‘제 식구 감싸기’도 여전했다. 5·18 망언, 부동산 투기 의혹, 성희롱 발언 등으로 47건의 의원 징계안이 접수됐지만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다.



20대 국회 구태 반복했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인 입법 활동도 뒷전이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모두 2만 4003건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된 법안은 8574건으로 35%에 불과했다. 최악으로 평가받던 19대 국회의 42%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분석한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평균 공약 이행 완료율도 50%를 넘지 못했다. 본업을 내팽개친 ‘일하지 않는 국회’의 전형이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선거제 개혁안과 검찰 개혁 법안의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안건) 지정을 둘러싸고 여야가 격렬하게 충돌하며 국회는 폭력과 막말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급기야 ‘조국 사태’로 인해 대화와 타협에 의한 여의도 정치는 실종됐고 시민들은 ‘거리 정치’로 내몰렸다.

이런 정치 현실에 그나마 일부 의원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기도 했다. “정치가 해답을 주기는커녕 문제가 돼 버렸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정치는 결국 여야는 물론 국민까지 모두 패자로 만들 뿐이다.”(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국회가 정쟁에 매몰돼 민생을 외면하고 본분을 망각했다”(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

분출하는 자성의 목소리에도 여야 정당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어김없이 구태와 악습을 반복했다. 당선 지상주의에 정당 간 이합집산이 판을 쳤다.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 기회 보장과 사표(死票) 방지를 위해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 등 거대 양당이 비례용 꼭두각시 정당을 내세우는 반칙과 꼼수를 거듭하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후보 공천 역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야는 ‘시스템 공천’ ‘혁신 공천’을 약속했지만 원칙을 무시한 채 룰(규칙)을 번복했다. 후보를 제멋대로 바꾸는 뒤집기 공천이 난무했다. 현역 의원 물갈이와 청년·여성의 참여 확대도 빈말에 그쳤다. 상대편에 대한 비난만 난무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과 비전 경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국회와 정당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마저 망각한 채 정치 불신과 탈정치를 부추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치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이고 비용이 적게 드는 수단이다. 그 출발은 선거다. 국정 농단 사태 속에서 퇴행을 거듭한 20대 국회가 그나마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킨 것은 성과로 꼽힌다. 여기에는 촛불 민심과 지난 총선 당시 유권자들이 만들어 준 여소야대의 국회 지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수처 설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법안, 유치원 3법 등 개혁을 뒷받침할 법적 기반이 마련되고 선거권이 만 18세로 확대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다시 선택의 날이 밝았다. 이번 총선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감염병 관리 체계 구축과 재난기본소득 등 민생 구제 대책, 경제 위기 극복, 정치 개혁 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중차대한 선거이다. 다행히 지난 10~11일 진행된 사전 투표율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하지만 ‘깜깜이 선거’ 속에서 여전히 찍을 만한 후보가 없다는 유권자들도 많다.



방관은 정치의 타락 부른다



그렇다면 투표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실망스럽다고 투표를 외면한다면 끝내 나쁜 정치를 바로잡을 수 없다. 플라톤은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의 타락은 방관에서 시작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유권자에게 돌아간다.

‘선거는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 정치의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비록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느껴질지라도 투표소에 가기 전 선거 공보물에 담긴 후보자 정보 공개 자료와 공약을 꼼꼼히 살펴 최선이 없을 땐 차선을, 그것마저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지역적으로는 호남 정치의 새로운 미래와 지역 발전을 견인할 인물을 골라내는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변화를 거부한다면 권력을 위임했던 유권자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투표 참여와 지속적인 감시로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정 등 개혁 이행을 압박해야 한다. 그것은 막장·구태·악습의 악성 정치 바이러스를 차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백신이 될 것이다.



/논설실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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