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의 ‘소설처럼’] 소설가의 선한 영향력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2020년 01월 30일(목) 00:00 가가
“21세기가 좋아. 22세기면 더 좋을 것 같아.” 정세랑은 이렇게 말하는 작가다.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시작을 담당하는 짧은 소설(5쪽밖에 되지 않는다.)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에 나오는 대사다. 한데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이 대사는 더 나은 세상을 강력하게 원하는 작가의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한 8편의 소설에 실린 인물들을 다 만나고 나면 스티븐 핑거의 명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떠오름은 어쩔 수 없다. 앞의 핑거와 뒤의 핑거가 같은 한글 표기인 것은 우연이겠지만, 어쩐지 운명이라고 너스레 떨며 우겨 보고 싶은 마음도 어쩔 수 없다.
크고 작은 분쟁은 멈추지 않고, 기후 변화에 인류의 삶은 송두리째 위협받고 있다. 지구와 생명의 탄생 이후 인류는 그들에게 더할 수 없는 악역으로 치부되고,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미싱 핑거… 아니, 스티븐 핑거는 ‘우리는 어쨌거나 나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의 이기심과 공격성 그리고 폭력성은 서서히 줄어들어, 지금이 최소치라고 한다.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들은 감정 이입과 이타심과 이성 등이다. 우리의 지난 과거는 지나치게 낭만화되고 우리가 사는 현재는 반대로 악마화되었는데, 정확한 수치에 의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품고 있는 존재이고, 역사는 천사의 자리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핑거 씨에 따르자면, 정세랑의 문장은 명확한 사실이다. 1·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비롯한 끔찍한 살육이 자행되었던 20세기보다 21세기가 좋고, 우리가 잘만 해낸다면 22세기는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잘 해낼까? 정세랑의 소설처럼 하면 된다. 혹은 하지 않으면 된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인물들은 선하고 담백하다. 실현 가능한 사랑을 낭만적으로 갈구하며, 상상 불가한 상황을 담담하게 통과해 낸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이러한 인물의 특징을 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작품은 아무래도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일 것이다. 일반적인 소설집이 일정한 분량의 작품을 골고루 배치시키는 데 반해, 이 책은 다섯 장에 불과한 아주 짧은 작품에서부터 중편이라 할 법한 작품까지 들쭉날쭉한 분량의 소설들을 자유롭게 배치시키는데,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그중 분량이 가장 긴 축에 속한다. 그렇기에 배경의 설명이 보다 상세하고, 여러 인물의 개인사가 비교적 친절히 설명된다.
알 수 없는 공간에 세워진 수용소에 ‘괴물’이라 불리는 이들이 갇혀 살고 있다. 목소리로 살인자들의 폭력 본능을 각성시키는 30대 남자, 머리카락에 분노를 쌓아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20대 남자, 온갖 바이러스의 슈퍼 보균자인 60대 남자, 무덤을 파 시체로 배를 채우는 소년. 서술하자니 괴물이라 불러 마땅하고, 외딴 곳에 격리하든 아주 없애 버리든 해야 할 것만 같지만, 정세랑 월드에서 그러한 혐오와 폭력은 없다. 그들은 그들의 핸디캡 혹은 개성의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받고, 그것을 제거할 것인지 그것을 간직한 채 사회와 떨어질 것인지 선택한다.
갑작스레 수용소에 갇히게 된 그들 또한 지극한 이타심으로, 본인도 모르게 사회에 미친 악한 영향력에 괴로워하며, 자족적 시간을 보낸다. 그들 앞에 나타난 변수는 사랑이다. 승균은 새로운 수용자인 연선을 사랑하게 되고, 연선을 위해 수용소의 규칙을 깨뜨린다. 연선은 수용소를 탈출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런 연선을 돕는다. 다른 수용자들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을 그들에게 준다.
책의 마지막 작품 ‘7교시’는 현대사 수업 시간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의 세계다. 그곳의 학생들 그러니까 22세기 이후의 청소년은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공부하며 이해할까. 우리는 17~18세기 사람들보다는 지혜롭지만 22세기 사람들보다는 어리석다.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입다가 한두 해 후에 버리는 사람들이다. 기아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식량을 마련하는 대신 가축에게 유전자 변형 사료를 먹이고 그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가 진정 괜찮은 종(種)일까? 이런 우리가 지금 이대로 지구를 지배하며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 정세랑의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질문은 정세랑이 작가로서 발휘하는 선한 영향력의 증명이다. 그 영향력 아래에 있기 위해 우리는 정세랑의 소설을 더욱 더 널리 읽어야 할 것이다.
알 수 없는 공간에 세워진 수용소에 ‘괴물’이라 불리는 이들이 갇혀 살고 있다. 목소리로 살인자들의 폭력 본능을 각성시키는 30대 남자, 머리카락에 분노를 쌓아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20대 남자, 온갖 바이러스의 슈퍼 보균자인 60대 남자, 무덤을 파 시체로 배를 채우는 소년. 서술하자니 괴물이라 불러 마땅하고, 외딴 곳에 격리하든 아주 없애 버리든 해야 할 것만 같지만, 정세랑 월드에서 그러한 혐오와 폭력은 없다. 그들은 그들의 핸디캡 혹은 개성의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받고, 그것을 제거할 것인지 그것을 간직한 채 사회와 떨어질 것인지 선택한다.
갑작스레 수용소에 갇히게 된 그들 또한 지극한 이타심으로, 본인도 모르게 사회에 미친 악한 영향력에 괴로워하며, 자족적 시간을 보낸다. 그들 앞에 나타난 변수는 사랑이다. 승균은 새로운 수용자인 연선을 사랑하게 되고, 연선을 위해 수용소의 규칙을 깨뜨린다. 연선은 수용소를 탈출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런 연선을 돕는다. 다른 수용자들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을 그들에게 준다.
책의 마지막 작품 ‘7교시’는 현대사 수업 시간이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의 세계다. 그곳의 학생들 그러니까 22세기 이후의 청소년은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공부하며 이해할까. 우리는 17~18세기 사람들보다는 지혜롭지만 22세기 사람들보다는 어리석다.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입다가 한두 해 후에 버리는 사람들이다. 기아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식량을 마련하는 대신 가축에게 유전자 변형 사료를 먹이고 그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다. 이런 우리가 진정 괜찮은 종(種)일까? 이런 우리가 지금 이대로 지구를 지배하며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 정세랑의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질문은 정세랑이 작가로서 발휘하는 선한 영향력의 증명이다. 그 영향력 아래에 있기 위해 우리는 정세랑의 소설을 더욱 더 널리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