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남은 과제들
군 기록은 말한다 ‘5·18의 실질적 책임자는 전두환’이라고
신군부의 비망록 ‘제5공화국 전사’
전두환 역할·책임 구체적으로 수록
무장헬기 출동 사실 기록도 확인
LMG 기관총에 의한 사망자 첫 공개
신체훼손 수류탄 파편 사망자 12명
헬기기관총에 의한 것인지 따져봐야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2019년 12월 26일(목) 04:50

합수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문서 1. 5·18관련 각종 조치 및 결심에서 전두환의 역할


문서 2. 5월 21일 자위권 결정


문서 2. 5월 21일 자위권 결정


문서 4. 충정작전 격려문


문서 5. 수류탄 파편 상·사망자


올해 3월부터 9회에 걸쳐서 5·18민주화운동 주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살펴봤다. 군 기록물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현재까지 쟁점이 되는 사건들의 진실과 왜곡의 역사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 연재에서는 미처 다루지 못했던 주제와 향후 진상규명의 과제를 살펴보면서 올해의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전두환과 5·18민주화운동, 헬기사격

이번 연재의 시작과 함께 본격화된 전두환 재판은 해를 넘겨 2020년까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1년 넘게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전두환은 여전히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특히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자신은 1980년 당시 광주 작전에 일체 관여한 바가 없으며, 책임질 역할을 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5·18민주화운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전두환의 주장과 달리 군 기록은 전두환을 실질적인 책임자로 기록하고 있다. 육군본부가 작성하고 보안사가 관리한 군 기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광주에서의 각종 작전 및 조치에 깊숙하게 관여했다. 문서 1에는 “광주 사건시 각종 조치 및 결심에 이르기까지 육군본부는‘국방장관, 합참의장, 해·공군총장, 연합사부사령관, 보안사령관(당시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들과 수차례 회의를 통하여 충분한 사태 및 상황분석과 가용방책 등을 진지하게 검토했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재직한 보안사에서 편찬 작업을 총괄한‘제5공화국 전사’에는 전두환의 역할과 책임이 더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제5공화국 전사는 보안사령부가 전두환 정권의 출범 과정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자료 수집 및 관계자 인터뷰 등을 거쳐서 작성한 총 9권의 책자이다. 제5공국 전사는 신군부의 내부 비망록처럼 보안사에서 비밀리에 관리해 오다가 1995년 특검 수사에서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5공화국 전사에서 5·18관련 내용은 제4편에 수록되어 있다.

문서 2와 같이 제5공화국 전사에는 5월 21일 자위권 결정에 대한 회의 정황이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5월 21일 국방부 장관실에서 개최된 자위권 결정 회의에는‘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유재현 합참의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진종채 2군 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를 비롯하여 5·18관련 대책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사람은 다름 아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

이렇듯 전두환 신군부가 작성한 군 기록에는 1980년 5월 당시 전두환의 주도적 역할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전두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군 관계자들 또한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지난 11월 11일 재판에서 전두환측 증인으로 출석한 제1항공여단장은 1980년 당시 광주를 방문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 특히 당시 헬기 작전은 광주전남 계엄사령부의 책임하에 이뤄졌기 때문에 헬기부대를 파견한 항공여단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헬기를 보유한 항공여단은 계엄사령부의 작전 명령에 따라서 헬기를 전교사에 파견하고 전교사에 배속해 줬기 때문에 배속 이후 작전은 항공여단과 무관하다는 논리이다. 제1항공여단장은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제1항공여단장의 법정 증언과는 달리 1982년 발행한 ‘항공병과사’에 따르면 제1항공여단장은 5월 26일 광주를 방문했다. 문서 3과 같이 1항공여단장외 6명은 UH-1헬기를 이용하여 26일 14시 45분 광주에 도착했다. 제1항공여단장이 광주를 방문했던 시기는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탈환 작전을 앞두고 작전 준비가 한창이었던 시각이다. 제1항공여단장과 함께 헬기에 탑승한 인물은 제1항공여단 작전처장, 항공감실 안전과장, 무장헬기부대의 책임자인 35항공단장 등이다. 제1항공여단장과 함께 광주를 방문한 군인들의 직책을 보면 이들의 방문 목적이 5월 27일 작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항공여단장은 5월 27일 도청탈환 작전 성공 이후 복귀했다. 제1항공여단장의 광주방문 시기는 공교롭게도 특공작전 부대의 책임자였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동선과 일치한다. 5월 27일 도청탈환 작전 과정에서 3공수여단은 무장헬기의 지원을 요청하고, 실제로 무장헬기가 출동했다는 사실이 군 기록에 남아있다.

전두환 재판에서 제1항공여단장과 헬기 조종사들은 헬기 운용과 작전은 전교사 책임하에 이뤄졌으며 항공여단은 작전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 5월 24일 제1항공여단의 상급부대이자 육군 항공부대의 총사령관인 항공감이 광주를 방문했다. 문서 3과 같이 항공감의 광주방문은 ‘소요사태 작전 지휘’목적이었다. 항공부대 차원에서 헬기 작전을 주도했다는 방증은 문서 4의 격려문에서도 확인된다. 5월 27일 육군본부에서 항공감실에 하달한 격려문에는 헬기 작전이 전교사가 아닌 항공여단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이렇듯 항공감실에서 작성한 ‘항공병과사’를 비롯한 군 기록에는 제1항공여단의 역할이 명확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항공여단장과 헬기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이들의 증언과 주장은 명백한 위증으로서 위증에 따른 법적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미완의 진실과 과제

이번 연재를 시작하면서 LMG 기관총에 의한 사망자가 존재한다는 군 기록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전두환 재판에서 헬기조종사들은 1980년 당시 헬기사격에 의한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헬기사격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1982년 3월 15일 발간한 육군본부의 ‘계엄사’(戒嚴史)문서 5에는 수류탄 파편상에 의한 사망자가 1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계엄사’는 계엄사령부인 육군본부가 10·26사태 이후 1년 3개월간 시행된 계엄상황에서의 계엄군의 역할을 백서로 편찬한 것이다.

‘계엄사’에 따르면 “수류탄 파편상에 의한 사망자 12명은 난동자들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 폭발사고에 기인한 것이었고, 계엄군은 수류탄을 지참하거나 사용한 일이 전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계엄사’에 수록된 내용과는 달리 1980년 당시 수류탄 폭발사고와 관련한 사실 자체가 없다.

수류탄 파편상에 의한 사망은 근거리 폭발 충격에 의한 사망으로서 일반적인 총격 사망과는 달리 상당한 신체 훼손을 동반한다. 따라서 1980년 당시 실제로 수류탄 폭발사고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망 원인은 다른 고성능 무기 즉 헬기 기관총 사격 등에 의한 사망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사망원인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곧 출범할 예정인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진실규명을 통하여 희생된 이들의 아픔을 위무하는 것이 소명임에도 여전히 우리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연재과정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연재가 시작될 때 많은 격려를 해주셨던 애독자이자 날카로운 비평가였던 전남대 사회학과 박해광 교수님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존경하는 스승이었으며 멋진 동료였던 박해광 선생님의 영전에 마지막 지면을 빌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5월의 진실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연구를 다짐해 본다. 특히 필자의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지면을 허락해주신 광주일보에도 감사를 표한다. 이번 연재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내용은 후일을 기약하면서 연재를 마무리한다.

/hes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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