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 방직공장
2019년 12월 04일(수) 04:50 가가
국내 방적업체 1위인 전방(옛 전남방직)과 3위인 일신방직은 원래 한 회사였다. 뿌리는 일본 가네보가 1935년 설립한 종연방적이다. 가네보는 목화 공급의 최적지인 전남에 공장을 설립했다. 1930년 학동 현 삼익세라믹 자리에 실을 뽑는 제사공장을 지은 데 이어 5년 후 임업시험장이 있던 임동에 방적공장을 설립했다.
창업 초기 종연방적은 방적기 3만5000추, 직기 1440대, 종업원 3000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였다. 종업원 기숙사를 운영했는데 생활 편의보다는 가혹한 노동으로 인한 이직률을 낮추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탈하는 ‘여공’을 채우기 위해 소녀들을 강제로 데려와 일을 시키는 인권 유린도 자행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은 1951년 전남방직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미군 통역관으로 일하던 김형남 등 3명에게 불하했다. 하지만 김형남이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려는 것을 놓고 김용주와 갈등을 빚으면서 1961년 두 개 회사로 분리됐다. 전남방직은 김용주가 맡고 일신방직은 김형남이 운영하기로 했는데, 종업원과 공장 건물 심지어 담장까지 반반씩 나눴다.
1960년대 전방은 종업원 6000명으로 국내 10대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70년대 중반에는 전방 계열사인 한일합섬이 단일 기업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70년대 후반 산업 중심이 전자와 석유화학으로 넘어가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방은 공장 가동 83년 만인 2017년 11월 임동 공장의 문을 닫았고 일신방직은 현재 임동 공장 일부 시설만 가동하고 있다.
전방과 일신방직이 임동 공장을 평동공단으로 이전하기로 하면서 광주시에 임동 공장부지 개발계획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8만8000평에 달하는 부지 활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제 수탈과 여공들의 눈물이 밴 근대 산업유산인 만큼 주요 시설과 건물을 보전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사유지라 시민들의 요구대로만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기업과 광주시가 접점을 찾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개발 이익보다는 공공 기여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성장 과정을 되돌아본다면 말이다.
/장필수 전남본부장 bungy@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은 1951년 전남방직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미군 통역관으로 일하던 김형남 등 3명에게 불하했다. 하지만 김형남이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려는 것을 놓고 김용주와 갈등을 빚으면서 1961년 두 개 회사로 분리됐다. 전남방직은 김용주가 맡고 일신방직은 김형남이 운영하기로 했는데, 종업원과 공장 건물 심지어 담장까지 반반씩 나눴다.
/장필수 전남본부장 bun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