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의 사죄
2019년 08월 28일(수) 04:50
2005년 5월 9일. 여든의 노신사를 비롯해 일본인 열 명이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 명성황후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자객들의 후손이었다. 을미사변이 발생한 지 110년 만에 조상을 대신해 용서를 구한 것이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가 한 일이 애국이라 생각했지만, 자라면서 할아버지의 행동이 잘못 됐음을 알게 됐다.” 이들은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지은 죄를 대신 사죄하고 늦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사과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해마다 한국을 방문해 조상들의 과오를 반성하며 속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중심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실을 일본에 알리고 올바른 역사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있다. 방문단을 이끌던 가와노 다스미 씨는 2012년 90세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참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후손들은 가해자 후손들의 진심 어린 속죄에 마음을 열고 2017년 구마모토를 찾아 가와노를 추모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 씨가 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했다. 전두환과 함께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아버지를 대신에 5월 민주 영령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신군부 관계자는 물론 직계 가족 가운데 광주를 찾아 사죄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노 씨는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노 씨의 사죄가 진심으로 읽히기 위해선 가해 당사자의 직접적인 사과가 필요하다. 숙환으로 거동이 힘든 노태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반성은커녕 5·18을 왜곡·폄훼하고 있는 전두환과 그 후손들의 속죄가 있어야 한다. 용서는 속죄가 이뤄진 뒤에 가능한 일이다. 가해자들이 속죄를 하고 사실을 인정한다면 끊이지 않는 5·18 왜곡 논란도 사라질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가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장필수 전남본부장 bun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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