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호 영암 신북성당 주임신부] ‘탐욕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2019년 08월 23일(금) 04:50
우리는 탈북한 마흔두 살의 엄마와 여섯 살배기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이 소식이 안타까운 것은 탈북 모자가 죽은 지 두 달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1인당 국민 소득 3만 달러 시대라 환호하며 보다 나은 복지 국가를 지향하자는 말이 무색하다. 더욱이 죽음의 원인은 아사였다는 소식에 놀랍고 안타깝고 당황스럽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고시원에서 썩은 냄새가 나서야 함께 숙식했던 동료의 죽음을 알았고, 점심은 겨우 사발면 하나였지만 그것도 먹지 못했고, 주어진 일감을 처리하려고 분주했던 지하철 하청 노동자였던 열아홉 살의 사회 초년생의 죽음, 이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우리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본성은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 유학에서 주장하는 성선설이다. 필자도 우리의 마음은 선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가끔 내 마음의 선함을 행동하기보다 주저할 때가 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이익을 생각할 때, 나의 눈이 가려져 볼 수 없게 되면서 멈칫할 때가 있다.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데, 끊임없이 봉사하고 싶은데, 대가 없이 희생할 수 있는데, 이 선한 마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는 것 같다. 예수는 인간의 선한 마음을 방해하는 그 장애물을 잘 알고 계셨다.

루카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우리의 눈이 왜 가려지는지 알려준다. 풍족함의 대명사인 부자는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생활하고, 종기투성이인 거지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울 뿐이다. 그런데 부자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풍족함에 젖어 있을 뿐이다. 무엇이 부자의 눈을 가려 식탁 아래에서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거지 라자로를 볼 수 없었던 것일까?

또 다른 비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는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명확하다. 재산을 모으려고 애쓰는 부자의 비유이다. 예수는 탐욕이야말로 탐닉(중독)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함정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달성했을 때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때, 재산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탐욕은 부자의 마음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탐욕은 우리를 타락(악덕)의 굴레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쉽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선이며, 많은 것의 소유가 우리의 행복의 조건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은 더욱더 우리를 불안정과 불만족으로 자극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탐욕의 함정’이다.

최근 지인과 대화 중에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구조적인 악의 폐해는 크지만 나와 관련이 없다면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내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탐욕의 대상은 물질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권력일 수 있으며, 기득권과 같은 편안함을 보장해주던 풍족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탐욕의 함정’에 빠지는 어리석음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려 버린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탐욕의 함정’이라는 악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유가 아닌 존재에 가치를 두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놀음과 같은 위험성은 피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 결국 인간 복지에 가치를 두는 것, 공동선이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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