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라도의 혼(魂)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 <8> ① 호남사림 정신적 지표 눌재 박상과 호남사림
호남사림 선비들의 목숨 건 맹세 ‘삼인대’서 기리다
2019년 04월 16일(화) 00:00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소호영당에는 호남사림의 정신적 지표로 추앙받는 눌재 박상 선생과 그의 조카 사암 박순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최현배 기자 choi@

호남의 선비정신은 절의(節義)와 충렬(忠烈)로 상징된다. 이 곳으로 유배 왔다가 숨진 김굉필과 조광조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현을 본받아 이상적인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학정치(道學政治)와 지치주의(至治主義)다.

호남사림은 김굉필에게서 배우고 조광조와 인연을 쌓으며 도학을 실천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고, 사림의병장들은 전쟁터에서 순절했다. 순절하자 더 추앙을 받았고, 그러다보니 절의와 충렬은 호남사림의 정신이 되었다. 이후 호남인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목숨 건 맹세

‘강천의 맑은 물은 동쪽으로 우렁차게 흘러가고 / 온릉의 울창한 나무는 북쪽을 바라보며 푸르고 푸르네 / 비석은 닳아 없어질 수 있겠으나 선생들의 이름은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전북 순창 강천산 삼인대(三印臺) 비명(碑銘)의 일부다. ‘삼인’은 무엇인가? 3개의 도장이다. 순창군수 충암 김정, 담양부사 눌재 박상, 무안현감 석헌 유옥의 직인, 곧 관인을 말한다.

때는 중종반정 10년이 지난 을해년(1515) 8월, 이들은 물 맑은 강천산에 모여 상소하는 일을 의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로 각자의 관인을 소나무가지에 걸었다.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맹세였다.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다.

당초 왕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으로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이다. 신수근은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박원종 등 반정공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후환을 염려한 반정공신들은 왕을 압박해 신씨를 7일만에 폐출시키고,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다. 장경왕후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0년 뒤 인종을 낳고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박상 등 세 사람은 상소에서 신비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쫓겨난 것은 성리학적 명분과 대의에 어긋나므로 복위시키고, 유교 질서를 어지럽힌 주동자들은 국모 폐출의 죄를 물어 관작을 추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로 조정은 파란이 일었다. 장장 9개월간 격렬한 논쟁 끝에 박상은 남평 오림역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를 갔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으니, 그럴만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오·갑자사화의 여파로 약화되었던 사림이 의리·명분론에 입각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4년 뒤 기묘사화의 불씨가 됐다.

당시의 상황에서 권력자의 의지에 반하는 주장이란 목숨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엄혹한 시대였음을 놓을 볼때, 실로 의기 넘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삼인대는 이 세 사람의 목숨 건 맹세를 기리는 곳이다. 당초 호남 유림들은 사당을 지어 추모하려 했으나, 당시 사당을 금하는 형세여서 대신 비석을 세웠다. 누대는 없고 비석만 있는 까닭이다.

박상의 과감한 지적과 비판은 사림의 정신적 지표가 됐고, 의리사상을 선도한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됐다. 사림 영수 조광조는 “신비복위소는 강상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찬했고, 중봉 조헌은 “김정·박상이 앞장서서 바른 언론을 폈다”고 평가했다.

송호영당의 눌재 박상 영정
◇임금 장인도 비행 일삼자 장살

이러한 실천적 의리는 그의 이전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연산군 11년(1505) 전라도 도사(지금의 전남도 부지사)로 부임한 그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애첩의 아비인 관노 우부리(김의)라는 자가 권세를 등에 업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비행을 일삼는 것을 보고는 잡아다 장살(때려죽임)해 버렸다.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도 절대왕정시대에 ‘왕의 장인’을 잡아다 죽인 것이다.

그의 높은 도덕적 지향과 기개가 여실히 드러난다. 아마 그는 타락한 폭군 연산군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것이리라.

연산이 대노하여 사약을 내렸고, 그는 우부리의 죄상을 알리려 제발로 한양길에 오른다. 장성 입암산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 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바지가랑이를 물고 잡아채는 것이 아닌가. 박상은 큰 길에서 벗어나 고양이를 따라 산길로 끌려가는데, 그 잠시 비켜선 순간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말을 타고 지나가버렸다. 박상은 길이 엇갈려 목숨을 부지했다가, 열흘 뒤 때마침 중종반정이 일어나 화를 면했다는 일화다.

1519년 기묘사화를 당해서는 모친상으로 인해 화를 면했는데, 조광조가 능주로 귀양을 오자 광주 밖으로 나가 맞이하며 의리를 다하였다.

박상은 성종 5년(1474) 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지흥은 원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인 광주 방하동(광주시 서구 서창동 절골마을)으로 낙향했다. 그가 광주 태생인 이유다.

그의 조카는 선조때 영의정을 두차례 지낸 사암 박순이다.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에는 눌재와 사암의 위패를 모신 송호영당이 있고, 바로 아래 후손으로 일제말 신문학운동을 주도했던 용아 박용철 생가가 있다. 광주 도로에는 그분들을 기려 이름 붙인 눌재로(남구 압촌동~벽진동)와 사암로(광산구 도천동~신촌동)가 있다.

전북 순창 강천산군립공원 강천사 앞에는 삼인대가 있다. 중종 10년, 담양부사 박상·순창군수 김정·무안현감 유옥 등 세 사람이 목숨을 걸고 상소(신비복위소)를 올린 곳이다. /전북 순창=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호남사림은 홀로 있지 않았다

호남사림은 기묘사림과 궤를 같이 한다. 당시 호남사림은 기묘사림의 12%를 점했다.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박상이다. 박상은 ‘신비복위소’ 사건으로 기묘사림을 일으켜세웠고, 패배했을때 그들을 살뜰히 돌봤다. 시회(詩會)를 열어 시대정신을 논하며 서로를 다독이고 다그쳤다. 박상·윤구·최산두·유성춘·신잠·임억령 등이 그들이다.

물론 박상 이전에도 사림은 존재했다. 세종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고려말 은거했던 필문 이선제, 불우헌 정극인 등이 출사했다. 또 세조의 등극으로 훈구대신의 영수가 된 신숙주의 손자들은 훈구에서 사림으로 전환했다.

호남사림은 정치적으로 패배했을지라도 시대정신은 잃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과 담을 쌓지 않고 모여 시와 경륜을 공유했다. 학맥과 인맥을 통해 서로 교류하면서 토론·창작하던 공간이 바로 서원과 향교, 누정이다. 특히, 누정은 그 중심 공간이 됐고, 가사문학의 산실이 됐다. 이것이 곧 호남가단이다.

호남사림의 정신적 토대와 실천성은 국난에 직면했을때 의병과 충절로 표출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의 모순이 노정됐을 때, 날카로운 비판적 식견과 개혁 논의(실학)로 본연의 지성적 책무를 다했다.

일반적으로 호남사림을 박상·김인후 등 도학계 사림, 임억령·정철 등 문학계 사림, 고경명·김천일 등 절의계 사림, 위백규·하백원 등 실학계 사림으로 나눈다. 그만큼 선비의 수가 많았고 다양함을 보여준다.

/전북 순창=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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