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8.15 '해방의 날' 6.25 '위축의 날' 휴전 '도약의 날'
2019년 02월 27일(수) 00:00

최은희가 주연을 맡은 ‘마음의 고향’은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만듦새가 일품이다.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8·15해방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속 시원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일제 군국주의의 전쟁 수행을 위한 선전 매체로 전락했던 수모에서도 벗어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영화는 해방과 함께 기지개를 켠 것은 물론 진정한 예술로서의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만만치 않았다. 일제 말기 전시체제를 거치며 영화 제작시스템은 무너져 있었고, 기자재는 낙후했으며, 필름도 귀해 제작 여건은 최악이었다. 많은 영화가 16밀리 필름으로 제작되었고, 심지어 무성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감격과 민족의 긍지를 영화로 표현하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열망까지는 꺾을 수 없었다.

이때 나온 영화들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애국지사들을 다룬 ‘안중근사기’(이구영·1946)와 ‘유관순’(윤봉춘·1948) 등이 만들어졌고, 새 조국 건설에 대한 기대를 극화한 영화들인 ‘해방된 내 고향’(전창근·1947)과 ‘새로운 맹서’(신경균·1947) 등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은 해방 후 제작된 최초의 극영화로 초등학생 똘똘이와 복남이가 도적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이야기로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자유만세’(최인규·1946)는 이 시기에 나온 영화 중 필름이 현존하는 영화로 독립투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닌 애국지사의 의지와 확신을 담고 있는 영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영화를 연출한 최인규 감독의 태도와 처세다. ‘태양의 아이들’(1944), ‘사랑의 맹서’(1945), ‘신풍의 아들들’(1945) 등과 같이 황국신민화와 일본군 자원입대를 권유하는 어용영화를 만들던 그가 해방이 되자마자 독립군의 항일 레지스탕스 영화를 발 빠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인규는 계속해서 영화를 통해 속죄의 행보를 보여주게 된다.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극복하는 종교인을 그린 ‘죄 없는 죄인’(1948)을 만들었고, 해방을 맞아 상해에서 귀환한 딸에게 모든 재산을 조국건설에 써달라고 유언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독립전야’(1948)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자유만세’에 출연한 전창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전창근은 일제 말기에는 친일 희곡을 집필하고 조선총독부의 국책을 선전하는 연극에 다수 출연하는 등 친일행위에 가담했다가, 해방 후에는 시나리오나 출연작들이 항일독립투사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최인규와 전창근은 일제 말기 어용 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 자신들의 영화를 통해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해방 후 제작 여건이 좋지 않았던 한국영화는 무성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검사와 여선생’(강대룡·1948)이 대표적인 영화다. 최루성 신파극인 ‘검사와 여선생’은 당시 변사로 활동했고, 마지막 변사로도 알려진 ‘신철’씨의 이름으로 유명한 영화이기도 하다.

1948년 8월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본격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담은 영화들이 제작되게 된다. 이와 함께 분단의 비극과 사상의 갈등을 담은 작품들도 만들어지게 된다. 이중 ‘성벽을 뚫고’(한형모·1949)는 여수순천사건을 다룬 영화로 처남과 매부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드러낸 비극으로 최초의 반공영화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한국영화는 이 무렵 일취월장한 작품을 내놓게 된다. ‘마음의 고향’(윤용규·1949)이 바로 그 작품인데, 어머니의 정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서정적인 감각이 빛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듦새가 뛰어나고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탁월하다. ‘마음의 고향’은 상영관 중 90% 이상이 외국영화가 상영되었을 만큼 한국영화가 열악한 상황에서 나온 수준 높은 영화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윤봉춘 감독
이 시기 극장가는 미군정 당시 미국 8대 메이저의 독점 배급사였던 중앙영화배급사(중배)가 제공한 미국영화에 의해 잠식되어 있었다. 미국영화가 연 1백 편 이상 상영되어 전체 상영 편수의 절반을 넘었다. 이 수치는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해방 5년간 61편(1946년 4편, 47년 13편, 48년 22편, 49년 20편, 50년 전반기 2편)인 것과 비교해볼 때 얼마나 큰 물량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영화산업을 더욱 위축시켰다.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영화동맹에서 활약하던 좌파영화인들은 월북했으며, 최인규 감독 같은 경우는 납북되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에 남은 영화인들은 기록영화와 문화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인들은 최전선에 종군하며 참전용사의 활약을 담은 작품, 신병들의 훈련이나 병영생활을 그린 작품, 폐허가 된 전후의 복구활동을 찍은 작품 등을 만들게 된다. 특히, 한형모 감독의 ‘정의의 진격’(1951)은 육해공군의 참전 실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맹서


이 시기의 특징으로는 16밀리 영화 제작이 성행했다는 점인데, 이는 필름 공급 등 제작여건이 열악했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급박한 전황으로 정부가 서울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자 영화인들도 자연스럽게 부산, 대구, 마산, 진해 등지로 흩어져 영화를 제작했다. 각 도시마다 군 촬영대 등이 있어 영화인들은 종군활동을 하는 와중에 극영화 제작에 열정을 쏟았다.

신상옥 감독은 대구에서 데뷔작 ‘악야’(1952)를 완성했다. 전쟁 때문에 극단적으로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양공주로 전락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부산에서는 전창근 감독이 계몽 영화인 ‘낙동강’(1952)을 내놓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주인공이 낙동강변의 농촌 마을을 일깨워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변화시킨다는 내용이다. 마산에서는 신경균 감독의 ‘삼천만의 꽃다발’(1951)이 완성되었는데, 전선에서 실명한 주인공이 어머니의 눈 이식으로 광명을 찾아 애인과 백년가약을 맺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기 정창화 감독도 데뷔작을 내놓게 된다. 밀수 일당들을 소탕하는 액션영화인 ‘최후의 유혹’(1953)이 바로 그 영화다. 이후 정창화 감독은 한국영화의 불모지였던 액션 장르를 개척하고 성숙시킨 인물로 임권택 감독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영화는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최신 영화 기자재의 도입, 그리고 관객의 절대적인 호응에 힘입어 힘찬 도약을 하게 된다. 한국영화인의 열정과 의지가 꺾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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