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나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진실을 찾아가는 예술 치유 ‘1991, 봄’
2018년 10월 23일(화) 00:00
청아한 가을 하늘 아래 재잘대며 남산을 산책하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나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즐거운 순간이다. 고령화 사회, 나 역시 나이 들어 가는 인생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이들과 동행하는 즐거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0월 11일 이후 국회 감사를 통해 연이어 터져 나오는 유아 교육 비리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기타 연주자로 변신한 강기훈

관행처럼 저질러 온 사립 유치원들의 구체적인 비리를 알게 될수록 교육적 양심 여부에 대한 회의와 허망한 마음조차 일어난다. 감사 결과와 전직 유치원 교사들이 고백한 사실들은 왜 이곳에 ‘헬조선’이란 신조어가 난무하는지 절감하게 만든다. 200명 넘는 아이들과 교사들을 위한 닭곰탕이 닭 세 마리로만 우려낸 국물이란 사실은 오히려 약과다. 명품 가방과 미용실 등 원장의 온갖 사적 소비가 유치원 체크카드로 지불됐다는 기록은 충격적이다.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는 비리를 알면서도 블랙리스트에 오를까 두려워 침묵했던 이들도 이젠 진실을 털어 놓을 용기를 갖게 된 변화가 보인다. 가을바람과 함께 다가온 그런 변화의 바람은 적폐 청산이 표현의 자유와 함께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런 아픈 사태를 접한 후 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어른으로서 면목이 없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 가운데 진실을 찾아 방황해 온 24년에 걸친 기록을 담아 낸 ‘1991, 봄’(2017, 권경원)을 보게 되었다. (김기설의) ‘유서 대필 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가짜 진실의 피해자 강기훈과 더불어 그 파장을 기타 연주곡 8개 악장 단락의 음악 다큐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진실 조작 과정과 그에 따른 피해자의 아픔, 번민과 방황이 기타 연주자로 변한 그를 따라가면서 관련자 인터뷰로 풀려 나간다. 당시 권력에 휘둘린 언론보다 비밀스러운 소통으로 여겨졌던 하이텔이나 천리안과 같은 PC 통신 작업 부분이나 검사의 강압적 심문 과정 혹은 시위 풍경 등이 인형극으로 재현되어 팍팍한 분위기를 풀어 주기도 한다.(이채로운 문재희 퍼펫티어의 작업이다.) 진실 조작에 따른 피해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암 투병을 하며 힘 빠진 손가락으로 연주에 몰입하는 강기훈의 변화된 모습은 예술 치유 현장처럼 보인다.

1987년은 “(책상을)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며 박종철 고문치사를 쇼크사로 위장했던 독재 권력에 맞선 6월 항쟁의 역사적인 해이다. 그런 강렬한 기억을 회고한 실화 영화 ‘1987’(2017, 장준환)은 표현의 자유 속에 국민의 힘을 증명해 냈다. 반면 민주화로 가는 길이 일사천리가 아니라고 해도, 4년 후인 1991년 봄은 잔인했다. 대학 축제 기간 해방제로 벌어진 민주화 시위는 강경 진압을 당하면서 그해 봄, 11인의 청년들이 분신 및 투신, 또는 의문사에 처하는 난국에 휘말려 들었다. 어버이날 청년 김기설의 투신 뉴스로 다큐는 시작된다. 20여 년 전 청년 시절 투쟁담을 이제 중년이 되어 회고하는 인터뷰들은 #1악장 ‘기타를 위한 전주곡’ 연주회로 연결된다. 이렇게 회고담에서 연주로 이어지는 구성은 과거 기억에 접속하는 플래시백이란 영화 기법도 우리가 영화를 보는 순간 현재진행형이란 묘미를 증명해 낸다. 즉, 과거 아픈 기억이기에 의식적으로 없앤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 현재 속에 과거와 미래는 이 다큐의 고백처럼 공존하는 것이다.

진실 찾기 권력 게임판을 보여 주는 24년에 걸친 회고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역사적 교훈이기도 하다. 1894년 프랑스 육군 포병 드레퓌스는 간첩 혐의로 억울한 국가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정보 유출 문건에 ‘D’란 암호명을 혐의로 본 것은 매우 불충분한 근거였지만, 그가 유대인이란 점에서 당시 프랑스의 인종 차별 관행이 작동한 셈이다. 그런 부당한 현실을 목격하며 베스트셀러 작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란 글을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에 투고해 부당한 권력 집행에 저항한다. 이로 인해 졸라는 비난은 물론 협박까지 당하지만 이후 진실이 밝혀지면서 사후 정의로운 문학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정의 위해 연대하는 또 다른 힘

권력의 진실 조작 스캔들로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한 이 사건은 권력의 힘에 휩쓸리는 우리 사회 특유의 또 다른 지식 권력을 목격하는 아픔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권력이 지배하건 정의로운 진실을 위해 연대하는 또 다른 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 권력의 피해자에서 후원자로 전복적 변신을 하며 만든 ‘(재)진실의 힘’이 원불교 문화원에서 개최한 음악 여행 ‘마음에서 마음으로’는 바로 그런 예술 치유의 장이다. 유서 대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매진했던 이석태 변호사의 경우 세월호 특조위 단식 고통을 겪으면서도 강기훈처럼 기타를 연주한다는 고백은 흥미롭다. 대필 조작 사건이 트라우마로 작동하기에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꺼리는 그를 ‘강 기타’라 부르며, 청년 음악가들과 연대하는 연주회 공연은 치유와 희망을 예술 효과로 증명해 준다.

예술의 동력은 아름다움 이전에 고통 에너지를 먹고 생산되는 깨우침이다. 그의 은은한 기타 선율과 담백한 사진 작업 이미지를 통해 그 깨우침이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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