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봉 고경명과 포충사 - 김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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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21일(화) 00:00
제봉 고경명은 1533년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으로 조부는 형조좌랑을 지낸 고운(高雲), 부친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이며 시호는 충렬공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장원하여 곧바로 전시(殿試) 응시의 특전을 받았다.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과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문 시기였던 1574년 5월에 무등산을 등반하고 유산기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저술하였다. 1581년 영암군수를 지내다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와 함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4년 성균관 사예를 거쳐 1590년 승문원 판교에 등용되었고, 이듬해 동래부사가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다. 두 아들 고종후·인후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에게 인계하도록 했다. 이어서 나주부사 김천일, 회재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전국 팔도의 의병을 규합한 제봉은 손수 병력을 이끌고 충남 금산까지 나아가 1592년 7월 10일 의병장 조헌 등과 합세해 대규모 왜적들과 전투를 벌이다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하였고 광주의 포충사, 금산의 성곡서원·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포충사는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선생의 충절을 기려 광주 대촌들녘에 건립하였다. 고경명을 중심인물로 하고 고종후와 인후, 유팽로와 안영을 배향한 사당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다.

1603년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건립 후 6차에 걸쳐 중수하였고, 1978∼1980년까지 현재의 새로운 사우를 짓고 정화사업을 하였다. 제봉의 장남 고종후는 진주성전투에서 김천일·최경회 등과 함께 순절하였고, 차남 고인후는 임란 때 부친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포충사 소장 자료로는 고경명친필 마상격문(馬上檄文), ‘제봉집’(霽峯集)·‘정기록’(精氣錄, 71매) 등의 목판 493매, 복호입안문서(復戶立案文書)와 고경명의 문과급제교지(1558) 등 고문서 6매, ‘포충사우가’(褒忠祠宇歌,1614) 외 현판문 3매 등의 유물이 있다.

제봉 선생은 시문과 서예, 그림에 재능을 두루 겸비한 대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구국의 대열에 앞장선 선생은 학문과 충절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우리 모두 우러러 경배해야 할 호남의 대표적인 의인(義人)이 아닐 수 없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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