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 막걸리도 빚어 색다른 첫 설 가슴 설레요
<3> 세종기지의 설
2015년 02월 17일(화) 00:00

남극세종과학기지에도 설날은 찾아온다. 특히 올해 설 연휴는 세종과학기지 창립 기념일과 겹쳐 각국 대원 초청 행사와 설날에 먹을 음식을 만들고 행사장을 정비하는 등 분주하다. 연초 1년간 무사안녕을 비는 고사를 지낸 것처럼 18일 설날 당일에도 대원들은 차례를 지낼 터다. 〈홍준석 28차 세종과학기지 고층대기연구원 제공〉

설날은 무너진 새해 결심을 다잡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음력 새해가 진짜 새해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무너진 결심을 주섬주섬 주워 담을 그 날이 오고 있다. 2015년 음력 새해는 2월 19일이다. 그리고 이번 2월 17일은 세종기지의 창립 27주년 기념일이다. 월동대원들은 지금 설날 준비와 창립기념일 행사 준비를 함께 하느라 분주하다.

창립기념일 행사는 세종기지의 가장 큰 행사이다. 세종기지 창립 27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온다. 그냥 손님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부두에서 현관에 도착하는 동선부터 벽에 붙은 안내문의 폰트까지 회의 안건이 된다. 행사에 참석하는 나라의 국기를 공평하고 안정적으로 게양하는 것도 중요하다. 단 하루, 단 한 끼일 뿐이지만 그 순간을 위해 1년 전부터 구입한 재료가 있고, 한국에서 따로 주문해 가지고 온 의상이 있다.

2015년 2월 현재 세종기지에서 준비하는 많은 것 중 음식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한번이지만 곡기를 제대로 끊어본 일이 있다. 원인은 슬픔도 아니었고 기쁨도 아니었다. 극심한 무기력이었다. 며칠이 지나 흰 쌀죽을 입에 댔다. 혀에 익은 흰 쌀이 닿았을 때 받은 느낌은 고분고분하다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순종의 느낌이었다. 무심히 여물을 먹는 소 같았다.

나는 죽을 다 먹었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음식은 가로로 있던 사람을 세로로 있게 할 수 있다. 입맛이 없을 때 밥을 먹을지 안 먹을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하지만 세종기지에서 그런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남극의 여름, 세종기지에는 약 8∼90명의 사람이 머문다. 7시 30분, 12시, 18시. 이렇게 하루 세 번 8∼90명의 입술이 열렸다 닫힌다. 그 세 번은 숨 한번 돌리면 성큼 다가와 있다. 매우 빈번하게 느껴진다. 한 번이라도 어떤 레스토랑의 뒷뜰 나무에 기댄 흰 조리복 차림의 청년을 본 적이 있다면 사람들의 입술이 그냥 벌어졌다 닫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남극에서의 허기는 실제로 배가 비어서 생기기도 하지만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 생기기도 한다. 허기는 근원적이고 강력한 갈증이다. 남극에서는 한 개인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그렇게 크지 않다. 크게 흡족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다음 식사 메뉴처럼 가까이 있고 어림잡을 수 있는 미래에 가능성을 걸게 된다.

12월부터 2월까지 세종기지 주방업무 하계지원을 맡은 신승환(23)씨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과 기지에서 만드는 음식과의 관계에 대해 “아무래도 남극에서는 먹고 싶은 걸 먹기 힘들기 때문에 평소에 먹고 싶었던 게 우연히 메뉴로 나오면 사람들이 무척 행복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생일을 맞은 대원을 위해 직접 손으로 40여분간 머랭을 치고 크림을 얹어 케이크를 만들었다. 누가 나를 위해 끼니를 챙겨준다는 것은 대단한 위로다.

누가 내 끼니를 신경 쓴다는 것 또한 위로다. “아침에 왜 밥 안 먹었어?” 여기서의 식사는 단순히 음식물을 위장에 집어넣는 행위가 아니라 구성원의 이상과 부재를 알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창립기념일 행사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오지만 설날에는 대부분 한국인들이 기지에 머문다. 여러 사람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원들과 조리장님이 합심하여 다양한 음식들을 준비했다.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7∼9개의 섹션별로 선정된 메뉴들이 게시됐다.

메론 프로슈토, 크로스티니 같은, 일상에서 보기 힘든 음식에서부터 문어숙회, 과메기 같은 별미 음식도 있었다. 비빔밥, 떡국, 식혜, 새우 부르스케타, 피칸파이, 녹두전, 참치 다다끼, 농어회, 콜컷햄 등 어느 나라의 누가 와도 즐거울 수 있는 메뉴로 구성하기 위해 며칠 밤 여러 사람의 휴식이 사라졌다. 자원을 받았고 추천도 받았다.

대원들은 조를 이루어 2월 초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장갑을 꼈다. 계량하고 맛을 보고 온도를 쟀다. 대원들은 주말을 반납하고 내내 서서 땀을 흘려가며 두부를 만들었다. 손을 베여가며 마늘껍질을 벗겼다. 한쪽에서는 꼬들꼬들한 밥을 지어 막걸리를 직접 빚었다.

세종기지의 심장, 발전기를 담당하고 있는 지준경(50) 대원은 “막걸리를 맛있게 빚기 위해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했습니다. 남극에서 맞는 설날이 얼마나 색다르고 뜻깊을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라며 막걸리 제조 소감을 밝혔다.

메뉴 하나도 그냥 메뉴가 아니고 한쪽에 놓인 의자도 그냥 놓인 게 아니다. 음식에 어울리는 음악도 진양조, 휘모리 장단의 가야금 산조, 반도네온 연주, 남미 라틴음악, 클래식, 트로트까지 다양하게 준비했다. 옵션을 갖춘다는 것, 그래서 참여자에게 뭔가를 선택할 자유를 준다는 건 분명한 배려이며 투자이다.

음력 설날이 되면 다시 다짐하고 싶은 게 있다. 배반하는 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내가 남극에 오래 몰입했던 걸 아는 사람들은 ’드디어 남극에 갔는데 거기서의 계획이 뭐냐’고 물어온다. 그런데 사실 난 남극에 오며 일부러 아무런 다짐도 하지 않았다. 배반을 보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안과 밖이 다른 게 싫었다. 나는 완전무결하게 아름답고 싶었다. 그러나 안과 밖이 있는 세상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뭘 할 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건 질색이지만,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는 게 의식보다는 헤아림에 가깝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밖에서 본 안과, 안에서 본 밖은 참 달랐다. 세종기지의 안팎이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2월 셋째 주가 될 것이다. 신승환 씨는 2월 23일 세종기지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는 경계에 있는 자로서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남극에 와서 정말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는 주변 상황을 한 발짝 뒤에서 보는 법을 배우게 된 거예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할 있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제 인생의 1막 1장을 여기서 마무리 지은 거 같아요. 앞으로 인생의 1막 2장을 시작하기 위한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진짜 하고 싶은 건 세계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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