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짓는 설빔 - 정선 시인
2026년 02월 13일(금) 00:20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온 집안 가득 맛있는 음식 냄새가 퍼졌지만 내 마음 한쪽이 타들어 갔다. 아버지는 저녁때가 다 되어 나를 양동시장으로 데려갔다. 시장은 환한 불빛 아래 북새통이었다. 옷가게들이 죽 늘어선 곳에 이르자 내 눈길은 부지런해졌다. 아버지가 옷을 고르라기에 옷걸이에 걸려 있는 한 벌짜리를 가리켰다. 연분홍 바탕에 진분홍 작은 연속무늬가 있는 재킷으로 우리 반의 부잣집 아이가 입은 옷이었다. 나도 그 옷을 입으면 그 애만큼 예뻐 보일 것 같았다. 아버지는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보더니 망설이다가 돌아섰다. 몇몇 가게에 마음에 드는 옷이 있었지만 내 기대는 빗나갔다. 결국 노란 바탕에 주황색 큰 꽃이 찍힌 도톰한 윗옷과 청록색 바지를 샀다. 초등학교 5학년이 봐도 그 배합은 촌스러웠고 싼 티가 났다.

집에 돌아와서 옷을 입어 본 후에도 내내 뾰로통했다. “우리 막냇딸, 이쁘기만 하구만.” 엄마가 위로해 주었다. 자기 전 머리맡에 놓고 몇 번을 쳐다봐도 어쩐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시골 할아버지 댁에 세배를 드리러 가는 길,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이 설빔을 뽐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내가 그렇게 입고 싶던 옷을 시골 아이가 입고 있었다. 도회지 아이인 난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아버지는 왜 한 번도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사 주지 않았을까? 그 청록색 바지는 불에 금방 구멍이 났다. 엄마를 따라간 가게 난롯불에 일부러 살짝 갖다 댔는지도 모른다.

설빔은 내 귀한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다. 지난해의 액운을 다 떨치고 새해에는 무탈하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형제가 많은 우리 집은 윗 형제의 옷을 물려받거나 작아진 옷을 늘이거나 깨끗이 빨아 설빔을 대신했다. 설날이 다가오면 엄마는 으레 낡은 ‘개실’을 일일이 풀어서 해진 실은 잘라내고, 구불구불한 실에 뜨거운 김을 쬐어 편 뒤 다시 감아 스웨터 짜는 집에 맡겼다. 뒤돌아보면 하나도 달갑지 않았던 그 설빔이 엄마의 기원이고 사랑이었다.

설빔을 입기 전에는 반드시 몸을 씻는다. 물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새해에 걸맞은 사람으로 만드는 작은 의식이다. 지난해의 액운과 절망과 슬픔을 모두 흘려보내고 깨끗한 새 몸에 새 마음을 입히는 것이다.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으면 독감으로 아팠던 아이, 오빠에게 대들던 아이, 엄마에게 떼쓰던 아이는 모두 사라지고 한 살 더 먹은 의젓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설빔은 형식적인 옷이 아니라 새해를 향한 염원이다. 어렸을 적, 엄마가 등잔불 아래서 며칠 동안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새로 짓거나 손질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온라인으로 쉽게 새 옷을 구입할 수 있는 요즘에도 다가오는 설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일만큼은 여전히 의미가 크다.

페루 쿠스코 사람들은 새해에 노란빛을 입는다. 아르마스 광장은 전야 축제의 여운이 짙었다. 타르초 같은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나풀거려 황금빛 물결이 일렁였다. 가게마다 노란 속옷들이 쌓여 있고, 사람들은 노란 꽃목걸이를 걸고 환하게 웃었다. 나도 쿠스코인들처럼 노란 속옷을 갈아입고, 노란 리본으로 좋은 기운을 붙잡고 싶었다. 잉카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신은 태양신 인티(Inti)였다. 태양을 닮은 노란색은 축복과 재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광장 한가운데서 태양의 후예들과 섞이니 덩달아 밝고 긍정적인 기운이 스며들었다. 나는 꽃목걸이를 사서 목에 걸고 노란빛을 입은 채 애저 요리 냄새가 감도는 광장을 지나 왔다.

찬란한 아침 햇살로 설빔을 짓고 싶다. 새해의 첫 태양을 간절히 맞이할 때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이 있다. 몇 해 전부터 게을러져 일출을 보지 못했지만 이번 설날에는 새벽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붉은 해를 기다려 볼 작정이다. 설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설빔으로 갈아입던 마음으로, 정한수를 떠 놓고 비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한 해의 묵은 것들을 여명으로 칼칼이 씻어 낸다. 내가 떠오르는 태양만을 바라보고 쏟아지는 그 빛에 잠시 눈멀어 하얗게 되는 순간, 태양이 나를 위해 눈부신 은총을 내리는 순간, 그 순간만큼 태양은 내 것이다. 온몸 가득 빛이 차오르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로 뻗친다.

드디어 새해 첫날, 황금빛 설빔을 입는다. 이제 고통에 절은 나는 빛 속에서 부서졌다. 그 황금빛 설빔을 입고 어제의 내가 아닌 새 사람으로 몸도 마음도 순전하게 리셋된다. 고대하던 새날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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