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능소화 필 즈음에- 이중섭 소설가
2025년 06월 23일(월) 00:00
페이스북에는 매일 과거에 썼던 글이 뜬다. 이번에는 대학 친구 J의 첫 기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페이스북의 글을 읽고 다음에 내 블로그에 들어가 그를 검색해 본다. 몇 가지 중에 이 글이 눈에 띈다.

꿈속에 J가 나타났다. 무슨 일일까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로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심각한 대변동이 일어날 것 같았다. 혹 그가 물질적인 풍요를 주려나 싶어 얼른 만 원어치 로또를 샀다. 그리고 며칠 잊어버렸다. 부랴부랴 로또 번호를 맞춰보았다. 열 줄의 번호에서 여섯 개의 숫자가 각각 따로 맞았다. 무언가 허전하고 이건 아닌 거 같아 아침 밥상에서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다.

“그럼, 얼마야?” 나보다 더 자본을 밝히지만 현실에는 둔한 아내였다. 천 원이면 한 줄에 여섯 자리 숫자와 보너스 한 숫자 중 세 자리 숫자가 맞아야 오천 원이라고 말하자 아내는 돈이 아깝다며 주절거렸다.

“하긴 J가 떠난 것이 이맘때쯤이었지. 벌써 몇 년이 지난 거야?” 약 십 년 동안 능소화가 피었다 지고 아득한 눈 속에 동백이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벌써라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

지방의 조그만 도시에서 각자 직장 생활을 할 때 그의 아내와 내 아내가 자주 전화 통화를 했다. 가끔 J가 숨기고 싶은 일들이 거름망을 통하지 않고 나한테까지 들려오곤 했다.

어느 일요일 이른 아침에 J의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 마신 술로 죽을 것 같다며 내가 왔으면 싶다고 했다. 병원에 가려는 것이었다. 조금 뜬금없고 어이없었다. 얼마나 물러터졌으면 술 때문에 병원에 간다?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술을 마시고 속이 쓰리면 토하고, 다시 누웠다가 또 토하고, 그래도 힘들면 술 깨는 음료를 사다 마시고, 또 몇 번 토하다가 오후 되어 조금 살 것 같으면 이제 슬슬 허기를 느끼면서 뭐 육개장이나 그런 술국이 생각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에게 한마디로 거절하며 심한 말도 함께 전해주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할 거란 말까지 합디다!”

그랬다. 이런 행동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속에서 쓰라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를 괜찮은 놈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그를 별로 무덤덤하게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우리 부부를 잉꼬부부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듣기 좋게 말하곤 했다. J의 배려에 대한 나의 한심함이 이제 하나하나가 다 미안했다.

J는 나와 성격이 아주 달랐다. 그는 뭐랄까 무엇이든 숨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뒤에서 호박씨를 까더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예의를 지키자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현실 생활에서는 예의를 지켜야 세계가 무사히 돌아간다는 그런 주의였다. 나와 다르게 J는 사람들 앞에서나 뒤에서나 일관되게 과장해서 말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대놓고 녀석 앞에서 그러지 말라고 자주 얘기했다. 그런데도 녀석은 무슨 힘든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나를 찾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런 것이 나를 아프게 했다.

이렇게 건방지고 무례하고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내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짧았고 현실에서는 그가 언제 세상을 떴는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채 그를 잊고 살았다. 꿈속에서 그가 나타나면 로또를 생각하는 경박한 자본주의의 액을 먹고 사는 벌레에 불과했다. 그건 그렇더라도 로또에서 최소한 5000원짜리 하나도 안 맞았다는 사실에는 실망했다. 다시 꿈에 그가 나타나면 그것부터 따져볼 생각이다.

그가 웃고 있는 영락 추모 공원은 5·18 망월 묘지 뒤편에 있는데 들를 때마다 공원 입구가 차로 엄청나게 막혔다. 다음 날 시골에서 올라오다가 들르자며 운전대를 돌리곤 했다.

페이스북에서는 과거의 일들을 계속 소환하고 현실 속 하루하루는 빠르고 변덕스럽다. 아침저녁으로 하천길을 걷는다. 장마 전선이 슬슬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다. 산책길에는 주홍색 능소화가 하늘하늘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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