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가 좋다, 전라도 외국인] “예향에서 예술인의 삶, 전라도 ‘情’에 스며들었죠”
2025년 06월 20일(금) 11:00 가가
<6> 예술로 지역에 뿌리 내린 외국인들
광주시립발레단 보그단 플로피뉴 씨
루마니아서 활동하다 2014년 한국행
광주 첫 무대 ‘카르멘’ 이후 정착해 10년
전남 곳곳 여행하고 맛집 탐방 ‘행복’
무용 교습소 운영 벨릭 씨
1997년 러시아에서 광주로 스카웃
광주시립발레단 보그단 플로피뉴 씨
루마니아서 활동하다 2014년 한국행
광주 첫 무대 ‘카르멘’ 이후 정착해 10년
전남 곳곳 여행하고 맛집 탐방 ‘행복’
무용 교습소 운영 벨릭 씨
1997년 러시아에서 광주로 스카웃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개 중 하나는 문화다. 춤과 그림 등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에 뿌리내린 외국인 예술인들은 무대와 화폭을 통해 지역민과 소통하며 감동을 전해오며 어엿한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
광주에서 활동 중인 루마니아 출신 발레리노 보그단 플로피뉴 씨, 러시아 출신 무용가 벨릭 씨,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화백 문빅토르 씨. 각자의 방식으로 광주에 스며든 세 사람의 삶을 통해 한국 정착기를 들여다봤다.
보그단 플로피뉴(34·Bogdan Plopeanu·루마니아)씨는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광주시립발레단 수석단원 자리에 올랐다.
12살에 부모의 권유로 발레를 시작한 그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국립오페라단, 루마니아 시비우 극장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다 2014년 서울 유니버셜발레단 무대에 섰다. 서울에서 활동하며 스승과 제자로 만난 루마니아 발레 마스터 플로린 브린두사의 권유로 광주시립발레단과의 인연을 맺었다.
10년 전 광주에 오게 된 그는 첫 무대로 ‘카르멘’을 공연했고,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 ‘돈키호테’ 등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다. 이후 시립발레단 수석단원이 된 그는 올해 ‘해적’과 ‘호두까기 인형’ 무대를 앞두고 있다.
보그단씨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이 친절하고, 외국인을 만날 때 굉장히 수줍어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광주는 더 따뜻한 곳이었다.
한 씬 한 씬을 할 때마다 행복해지는 무용을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보그단씨는 주중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발레 연습을 하고, 주말에는 함께 살고 있는 발레리나 여자친구와 함께 목포, 나주 등 전남 곳곳을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광주 무등산을 참 좋아해요. 등산 후에 즐겨찾는 레스토랑에서 치킨수프를 먹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삼겹살과 소주는 제 마음을 사로잡아요. 전남 곳곳의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신선한 음식도 먹어보고 고즈넉한 분위기도 좋습니다. 계속 살고 싶은 곳이에요.”
처음에는 언어, 음식, 식당에 가는 것 모두 어려웠다. 연습이 끝난 후 한국어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발레 단원들과 선생님 덕분에 적응해갈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 30대 중반이지만 몸 상태가 아주 좋아요. 앞으로 다치지 않고 무대에 더 오래 서고 싶어요. 광주에서 발레리노로서 지역 사람들에게 더 멋진 무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후 발레 마스터가 돼 광주에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할 계획입니다.”
러시아 국적의 몽골계 민족인 벨릭(49·Nor boev Beligte)씨는 광주시립발레단 발레리노 출신으로 현재 광주시에서 아내와 함께 무용 교습소를 운영 중이다.
벨릭씨는 1997년 러시아 발레 콩쿠르에 방문해 그의 공연을 본 현재 박경숙 광주시립발레단 감독의 스카웃 제안으로 한국으로 왔다. 그는 IMF 시대에 와서 직접 금모으기 운동도 참여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월급을 받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절반이 깎여있었어요. 이렇게 경제가 갑자기 어려워질 수도 있구나 생각했죠. 그럼에도 발레를 할 수 있어 좋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게 흥미로웠어요. 물론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벨릭 씨는 게약기간인 1년 정도만 살 생각이었지만, 시립발레단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보고 좋아하는 무용을 오래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광주시립발레단에 7년, 서울 유니버셜발레단에서도 2년을 발레리노로 활동한 후 2005년 광주에 정착했다. 그 사이 김정희 발레리나와 결혼을 한 후 예쁜 딸 아이를 낳았고, 아내와 함께 무용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언어가 어려워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벨릭씨.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단어를 벽에 붙여놓고 중얼거리면서 수없이 반복학습했다고 한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당시 발레리노는 극소수라 더 외로웠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인정에 스며들었다.
“공연 연습이 끝나면 다같이 모여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게 낙이었어요. 다같이 뭉치고 만나는 문화가 좋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참 따뜻했고, 특히 광주 사람들은 어려우면 서로 도와주고 인정이 넘쳐났어요. 지금은 많이 개인주의가 된 것 같아 아쉽지만요.”
3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고향인 러시아에 산 기간을 넘어섰다. ‘제2의 고향’ 그 이상의 의미다. 벨릭씨는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해 청주시에 살고 있는 셋째 누나도 있어 도움을 받고 있다.
벨릭씨는 외국인으로서 한국, 광주를 바라볼 때 필요한 건 열린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 사람들은 아직까지 ‘우리 것’이라는 경계심도 있는 것 같다”며 “5·18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광주,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는 ACC가 있는 광주에서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맞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벨릭씨 부부는 그동안 수많은 발레리나·발레리노 제자들을 양성했다. ‘제자들을 잘 가르쳤네’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다. 현재 대학교 4학년 그의 딸도 부모를 따라 전공을 발레로 선택해 배우고 있다.
그는 “발레는 예술로서 감동을 주는 묘미가 있는 마법, 중독 같다”며 “광주에서 발레를 하고,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이 만족스럽다. 앞으로 발레가 시민들에게 건강한 문화가 될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시에서 외국인 주민이 2만 6485명으로 가장 많은 광주 광산구. 광산구 월곡동에 자리한 고려인 마을에는 카자흐스탄 고려인 출신 문빅토르(74) 화백이 있다. 그는 지난해 광주로 와 영구 정착하기로 했다.
문 화백은 고려인 3세로 1951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태어나 1975년 알마티 고골 미술대학 졸업 후 20년간 국립고려극장 주임 미술가로 활동했다. 고려인 강제 이주의 아픔과 민족 정체성을 화폭에 담아낸 예술가로 활동중이다. 문 화백은 ‘문빅토르 미술관’을 운영해 고려인 강제 이주와 독립운동 역사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 초록색 건물인 ‘월곡 고려인 문화관 결’에는 문 화백이 기증한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열차’의 모습이 담긴 타일 벽화가 설치돼 곳곳에서 문 화백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또 지난해 3월 고려인마을에 문을 연 ‘문빅토르 미술관’ 건물에 고려인들이 잊지 못했던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을 담은 작품과 ‘꿈꾸는 고려인 마을’ 문구도 인상적이다.
“제 작업실이자 생활공간까지 어우러진 소박한 공간이에요. 한 땀 한 땀 만드는 작품에 역사, 문화, 예술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저와 고려인 동포들의 삶을 따뜻하게 담아내고 싶어요.”
그의 대표작으로는 ‘홍범도 장군’, ‘우수리스크 나의 할아버지’, ‘1937 고려인 강주 이주 열차’ 등이 있다.
“88올림픽 기념으로 카자흐스탄 동포들과 한국에 왔어요. 이후 고려인마을에서 초대해서 오랫동안 광주를 오갔어요. 광주에 거주할 수 있게 된 건 동포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이에요. 현재 작업실도 있고, 그림 그릴 공간도 있고, 주변 화가, 시인들도 많아 생활이 즐겁습니다. 특히 의료시설이 잘 되어 있어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문 화백은 “음식도 맛있고, 공기도 좋은 광주전남에서 건강하게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양재희 기자 heestory@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광주에서 활동 중인 루마니아 출신 발레리노 보그단 플로피뉴 씨, 러시아 출신 무용가 벨릭 씨,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 화백 문빅토르 씨. 각자의 방식으로 광주에 스며든 세 사람의 삶을 통해 한국 정착기를 들여다봤다.
12살에 부모의 권유로 발레를 시작한 그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국립오페라단, 루마니아 시비우 극장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하다 2014년 서울 유니버셜발레단 무대에 섰다. 서울에서 활동하며 스승과 제자로 만난 루마니아 발레 마스터 플로린 브린두사의 권유로 광주시립발레단과의 인연을 맺었다.
한 씬 한 씬을 할 때마다 행복해지는 무용을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보그단씨는 주중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발레 연습을 하고, 주말에는 함께 살고 있는 발레리나 여자친구와 함께 목포, 나주 등 전남 곳곳을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
“광주 무등산을 참 좋아해요. 등산 후에 즐겨찾는 레스토랑에서 치킨수프를 먹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삼겹살과 소주는 제 마음을 사로잡아요. 전남 곳곳의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신선한 음식도 먹어보고 고즈넉한 분위기도 좋습니다. 계속 살고 싶은 곳이에요.”
처음에는 언어, 음식, 식당에 가는 것 모두 어려웠다. 연습이 끝난 후 한국어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발레 단원들과 선생님 덕분에 적응해갈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 30대 중반이지만 몸 상태가 아주 좋아요. 앞으로 다치지 않고 무대에 더 오래 서고 싶어요. 광주에서 발레리노로서 지역 사람들에게 더 멋진 무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후 발레 마스터가 돼 광주에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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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출신 광주시립발레단 수석 단원 보그단 플로피뉴. |
벨릭씨는 1997년 러시아 발레 콩쿠르에 방문해 그의 공연을 본 현재 박경숙 광주시립발레단 감독의 스카웃 제안으로 한국으로 왔다. 그는 IMF 시대에 와서 직접 금모으기 운동도 참여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월급을 받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절반이 깎여있었어요. 이렇게 경제가 갑자기 어려워질 수도 있구나 생각했죠. 그럼에도 발레를 할 수 있어 좋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게 흥미로웠어요. 물론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벨릭 씨는 게약기간인 1년 정도만 살 생각이었지만, 시립발레단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보고 좋아하는 무용을 오래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광주시립발레단에 7년, 서울 유니버셜발레단에서도 2년을 발레리노로 활동한 후 2005년 광주에 정착했다. 그 사이 김정희 발레리나와 결혼을 한 후 예쁜 딸 아이를 낳았고, 아내와 함께 무용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언어가 어려워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벨릭씨.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단어를 벽에 붙여놓고 중얼거리면서 수없이 반복학습했다고 한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당시 발레리노는 극소수라 더 외로웠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인정에 스며들었다.
“공연 연습이 끝나면 다같이 모여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게 낙이었어요. 다같이 뭉치고 만나는 문화가 좋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참 따뜻했고, 특히 광주 사람들은 어려우면 서로 도와주고 인정이 넘쳐났어요. 지금은 많이 개인주의가 된 것 같아 아쉽지만요.”
3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고향인 러시아에 산 기간을 넘어섰다. ‘제2의 고향’ 그 이상의 의미다. 벨릭씨는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해 청주시에 살고 있는 셋째 누나도 있어 도움을 받고 있다.
벨릭씨는 외국인으로서 한국, 광주를 바라볼 때 필요한 건 열린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광주 사람들은 아직까지 ‘우리 것’이라는 경계심도 있는 것 같다”며 “5·18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광주,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는 ACC가 있는 광주에서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갖고 사람들을 맞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벨릭씨 부부는 그동안 수많은 발레리나·발레리노 제자들을 양성했다. ‘제자들을 잘 가르쳤네’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다. 현재 대학교 4학년 그의 딸도 부모를 따라 전공을 발레로 선택해 배우고 있다.
그는 “발레는 예술로서 감동을 주는 묘미가 있는 마법, 중독 같다”며 “광주에서 발레를 하고,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이 만족스럽다. 앞으로 발레가 시민들에게 건강한 문화가 될 수 있도록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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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노 벨릭과 그의 아내 김정희 발레리나. |
문 화백은 고려인 3세로 1951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태어나 1975년 알마티 고골 미술대학 졸업 후 20년간 국립고려극장 주임 미술가로 활동했다. 고려인 강제 이주의 아픔과 민족 정체성을 화폭에 담아낸 예술가로 활동중이다. 문 화백은 ‘문빅토르 미술관’을 운영해 고려인 강제 이주와 독립운동 역사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 초록색 건물인 ‘월곡 고려인 문화관 결’에는 문 화백이 기증한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열차’의 모습이 담긴 타일 벽화가 설치돼 곳곳에서 문 화백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또 지난해 3월 고려인마을에 문을 연 ‘문빅토르 미술관’ 건물에 고려인들이 잊지 못했던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을 담은 작품과 ‘꿈꾸는 고려인 마을’ 문구도 인상적이다.
“제 작업실이자 생활공간까지 어우러진 소박한 공간이에요. 한 땀 한 땀 만드는 작품에 역사, 문화, 예술을 담아내려고 합니다. 저와 고려인 동포들의 삶을 따뜻하게 담아내고 싶어요.”
그의 대표작으로는 ‘홍범도 장군’, ‘우수리스크 나의 할아버지’, ‘1937 고려인 강주 이주 열차’ 등이 있다.
“88올림픽 기념으로 카자흐스탄 동포들과 한국에 왔어요. 이후 고려인마을에서 초대해서 오랫동안 광주를 오갔어요. 광주에 거주할 수 있게 된 건 동포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이에요. 현재 작업실도 있고, 그림 그릴 공간도 있고, 주변 화가, 시인들도 많아 생활이 즐겁습니다. 특히 의료시설이 잘 되어 있어 빠르게 치료받을 수 있는 점이 좋습니다.”
문 화백은 “음식도 맛있고, 공기도 좋은 광주전남에서 건강하게 계속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양재희 기자 heestory@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