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되짚어본 광주·전남 아·태전쟁 유적] 해방된 조국 앞에 두고…꽃같은 청춘 118명 ‘슬픈 귀향’
2025년 06월 08일(일) 20:00 가가
[<10> 해남 옥매광산 노동자 해몰사건]
제주 강제 동원된 해남 광산 노동자 255명
광복 직후 고향 향하다 청산도서 침몰 사고
생존자 137명 나무 발판 의지해 구사일생
마지막 생존자 김백운 씨 2018년 사망
“불쌍한 민초들 목숨 잃어 가슴에 피멍”
생전 TV 출연해 강제 노동 등 증언
제주 강제 동원된 해남 광산 노동자 255명
광복 직후 고향 향하다 청산도서 침몰 사고
생존자 137명 나무 발판 의지해 구사일생
마지막 생존자 김백운 씨 2018년 사망
“불쌍한 민초들 목숨 잃어 가슴에 피멍”
생전 TV 출연해 강제 노동 등 증언
1945년 8월 20일, 완도 청산도 앞바다. 광복의 기쁨도 채 누리지 못한 채 귀향길에 나섰던 조선 청년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주도로 동원됐던 해남 출신 옥매광산 노동자 250여 명이 열악한 목선을 타고 고향으로 향하다 침몰 사고를 당한 이른바 ‘옥매광산 노동자 해몰사건’이다. 이 사고로 무려 118명이 목숨을 잃었다.
옥매광산은 일제강점기 명반석을 채굴하던 주요 군수광산이었다. 이곳에 동원된 조선인 인부는 120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다수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해방 직전 일본 군수물자 운송을 위해 제주도로 이송돼 고된 중노동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옥매광산 노동자들의 제주도 강제동원 시기는 1945년 3월 경이었다. 생존자들은 최소한 2차례로 나눠서 제주도로 이동시켰다고 증언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를 한 피해자는 당시 “광산에서 처음에 동원될 적에 우선 회사 광장으로 집합하라고 했다. 제주도로 간다는 말은 안했다. 모여놓고 보니까 주위에 경찰하고 헌병이 포위하고 있었고, 배타는 데로 끌려갔다. 일본 헌병이 총칼을 들고 서 있는데, 완전히 짐승 취급을 받았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로도 당시 일본인 관리자는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휴전일 뿐”이라며 사실을 은폐했다.
미군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일본 군수선이 파괴된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작은 목선을 마련해 귀향을 시도했다.
250여명이 몸을 실은 귀향선은 항해 도중 세 차례의 기관 고장을 겪였고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면서 급속히 침몰했다.
조난자들이 사투 벌이는 와중 일본 군함 초계함은 구조를 시작했으나 일본 군함 초계정은 자국 시민 생사여부만 확인 후, 조선인 구조 작업 중단하고 떠났다.
4시간에 걸친 표류 끝에 255명 중 137명은 가까스로 구조됐지만, 118명은 끝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부 생존자들은 물로 무거워진 옷을 벗은 탓에 알몸 상태로 청산도 방파제 근처에서 구조됐다.
당시 청산도 주민은 이들을 발견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이를 들은 청년들은 뭔가 싶어 몽둥이를 들고 뛰어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이들을 도왔다.
주민들은 광복절 프랑카드를 찢어 생존자들의 몸을 가릴 수 있도록 한 뒤 옷을 빌려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철희 옥매광산유족회장은 “아버지 말에 의하면 당시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의 가슴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있었다”고 전했다.
배가 폭파되면서 나무발판 하나를 붙잡고 새벽까지 버티면서 파도가 치는대로 발판이 가슴을 때리면서다.
박 회장은 “불쌍한 민초들이 끌려가서 목숨을 잃은 건데, 역사가 제대로 안 남아 있다”며 “당시에 동아일보에 세 줄로만 나왔다. ‘제주에 끌려갔다가 귀향 중에 다수의 사람이 청산도 앞바다에서 사망했다.’ 그렇게만 나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도 그 사람들 이야기하면 눈물 나고 잊을 수가 없다. 살아계셨던 분들도 돌아가시고, 이제는 그 이야기를 해줄 사람도 없어졌다”며 “역사로 남겨야 하는데, 아무도 이걸 기록하려고 하지 않고 방치해 놓으면 뭐가 남겠나. 이게 잊히면, 나라가 역사를 잊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에 사는 유족들은 당시 사고를 조사하고 당시를 남기기 위해 증언이 담긴 목소리도 자발적으로 녹음했다.
추모비에 적혀있는 생존자 중 마지막 1인 김백운씨는 2018년 사망했으며, 생전에 유족회에서 해남군을 통해 육성 증언 녹음 자료를 남겼다.
당시 18세였던 김씨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30화에 출연해 “2교대 중노동을 하던 중 강제로 제주로 끌려갔고, 해방 후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옥매산 광부들의 해몰사건은 긴 세월 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2012년 옥매산 꼭대기에서 일제의 쇠말뚝이 발견되며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해당 사건을 기초 조사에 포함시켰지만, 이는 사건 발생 67년이 지난 뒤였다.
지금도 유가족들은 매년 음력 8월 24일을 희생일로 정하고, 하루 전인 23일에 합동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매년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됐다.
해방 이후로도 유족들은 마음 편히 제사조차 지내지 못했다. 희생자를 기릴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이름 없는 돌탑만을 세워둔 채, 유족들이 맨바닥에서 자비로 5000원씩 모아서 진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 2017년에는 해남군민 1300여 명이 1만원씩을 모아 옥동리 옥매산 선착장 인근에 ‘118인 광부 추모비’를 세웠다.
/글·사진=김진아 기자 jinggi@kwangju.co.kr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제주도로 동원됐던 해남 출신 옥매광산 노동자 250여 명이 열악한 목선을 타고 고향으로 향하다 침몰 사고를 당한 이른바 ‘옥매광산 노동자 해몰사건’이다. 이 사고로 무려 118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의 옥매광산 노동자들의 제주도 강제동원 시기는 1945년 3월 경이었다. 생존자들은 최소한 2차례로 나눠서 제주도로 이동시켰다고 증언했다.
미군의 공습으로 대부분의 일본 군수선이 파괴된 상황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작은 목선을 마련해 귀향을 시도했다.
250여명이 몸을 실은 귀향선은 항해 도중 세 차례의 기관 고장을 겪였고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하면서 급속히 침몰했다.
조난자들이 사투 벌이는 와중 일본 군함 초계함은 구조를 시작했으나 일본 군함 초계정은 자국 시민 생사여부만 확인 후, 조선인 구조 작업 중단하고 떠났다.
4시간에 걸친 표류 끝에 255명 중 137명은 가까스로 구조됐지만, 118명은 끝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부 생존자들은 물로 무거워진 옷을 벗은 탓에 알몸 상태로 청산도 방파제 근처에서 구조됐다.
당시 청산도 주민은 이들을 발견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이를 들은 청년들은 뭔가 싶어 몽둥이를 들고 뛰어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이들을 도왔다.
주민들은 광복절 프랑카드를 찢어 생존자들의 몸을 가릴 수 있도록 한 뒤 옷을 빌려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철희 옥매광산유족회장은 “아버지 말에 의하면 당시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의 가슴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있었다”고 전했다.
배가 폭파되면서 나무발판 하나를 붙잡고 새벽까지 버티면서 파도가 치는대로 발판이 가슴을 때리면서다.
박 회장은 “불쌍한 민초들이 끌려가서 목숨을 잃은 건데, 역사가 제대로 안 남아 있다”며 “당시에 동아일보에 세 줄로만 나왔다. ‘제주에 끌려갔다가 귀향 중에 다수의 사람이 청산도 앞바다에서 사망했다.’ 그렇게만 나왔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지금도 그 사람들 이야기하면 눈물 나고 잊을 수가 없다. 살아계셨던 분들도 돌아가시고, 이제는 그 이야기를 해줄 사람도 없어졌다”며 “역사로 남겨야 하는데, 아무도 이걸 기록하려고 하지 않고 방치해 놓으면 뭐가 남겠나. 이게 잊히면, 나라가 역사를 잊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에 사는 유족들은 당시 사고를 조사하고 당시를 남기기 위해 증언이 담긴 목소리도 자발적으로 녹음했다.
추모비에 적혀있는 생존자 중 마지막 1인 김백운씨는 2018년 사망했으며, 생전에 유족회에서 해남군을 통해 육성 증언 녹음 자료를 남겼다.
당시 18세였던 김씨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30화에 출연해 “2교대 중노동을 하던 중 강제로 제주로 끌려갔고, 해방 후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옥매산 광부들의 해몰사건은 긴 세월 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2012년 옥매산 꼭대기에서 일제의 쇠말뚝이 발견되며 비로소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해당 사건을 기초 조사에 포함시켰지만, 이는 사건 발생 67년이 지난 뒤였다.
지금도 유가족들은 매년 음력 8월 24일을 희생일로 정하고, 하루 전인 23일에 합동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매년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됐다.
해방 이후로도 유족들은 마음 편히 제사조차 지내지 못했다. 희생자를 기릴 비석 하나 세우지 못하고 이름 없는 돌탑만을 세워둔 채, 유족들이 맨바닥에서 자비로 5000원씩 모아서 진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후 2017년에는 해남군민 1300여 명이 1만원씩을 모아 옥동리 옥매산 선착장 인근에 ‘118인 광부 추모비’를 세웠다.
/글·사진=김진아 기자 jingg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