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장미꽃이 진 후에 여름이 온다- 이중섭 소설가
2025년 06월 02일(월) 00:00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았다. 수술 후 두 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불편하다. 전날 주치의는 경과가 좋다며 조직검사에서도 암 증상은 보이지 않고, 췌장내 유두상 점액종은 생각보다 중간 정도고, 개복하니 췌장이 조금 깨끗지 않아 예상보다 절제를 많이 했다고 했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췌장은 마치 아귀 내장처럼 보였다. 그나마 남은 입맛이 싹 사라졌다. 빠진 몸무게는 석 달쯤 지나면 회복되니 자주 걸으라며 다음 진료를 석 달 후로 잡았다.

아침 다섯 시쯤 일어나 집 근처 하천을 걷는다. 공기가 서늘하다. 산책길 옆 화단에는 키 작은 청보리가 심겨 있고, 샛노란 애기똥풀꽃, 무릎 높이의 접시꽃 그리고 하천 위 양 도로 옆으로 붉은 장미가 넝쿨 져 있다. 그렇지, 아직은 장미의 계절이지. 내 몸의 움직임과 다르게 여전한 자연의 현상에 마음이 놓인다. 조금 더 걸으니 물속에 왜가리와 백로가 보인다. 어린 새끼를 거느린 두 무리의 야생오리 가족도 먹이를 찾아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다람쥐 무늬의 새끼 오리들이 다리 밑 웅덩이에서 생업에 충실하다.

다리 난간에는 대선용 플래카드가 요란하게 달려 있다. 낮이면 들리던 확성기 소리,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양 진영의 목소리가 징그럽다. 이쯤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하지만 마음도 몸도 계속 걸어도 괜찮다고 속삭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죽 걷고 싶은 마음도 그것을 부추긴다.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을 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전쟁터의 부상 병동 같았다. 간호사들은 메디컬 카트를 끌며 끊임없이 딸그락거렸다. 의료기구들이 부딪히는 소리, 이것저것 환자의 상태를 묻는 소리, 악을 쓰는 환자의 목소리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취에서 막 풀린 몸 상태인데 주위가 너무 산만하니 몸과 정신이 분리된 듯 혼란스러웠다.

몸에 장착한 장치들은 마치 전쟁터에서 진지를 구축해 놓은 것 같았다. 신속하고 편리하게 약물을 투여하려고 만든 보급로 같았다. 왼쪽 팔에는 입구가 두 개로 갈라진 중심 정맥관, 배꼽 오른쪽에도 두 개의 튜브 관, 그 아래 요도에도 한 줄의 튜브가 설치되었다. 수액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혈액으로 나오는 찌꺼기와 오줌을 끊임없이 받아냈다. 주렁주렁 달린 장치들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오줌통을 가장 자주 비워야 했다. 침대 옆에 수액 걸이 폴대에서 영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했다. 게다가 수술 부위를 보호하려 복대를 차니 더 갑갑했다.

전철역을 지나 하류로 내려갈수록 하천의 폭이 넓어지고 물이 많다. 갑자기 하천가에 진한 초록의 샛노란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검색해 본다. 노랑꽃창포다. 근래에 노랑꽃이 이렇게 신선하게 보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반갑다. 물 많은 하천에 노랑꽃창포가 다복하고, 하천 위 도로 양옆으로 덩굴장미가 피어 있다. 이곳은 분홍 장미꽃이다. 아기 손보다 더 작은 꽃들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병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술한 환자들의 앓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대부분 수술을 한 환자들이 밤새 가래를 그르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가족 간병인이 환자를 재촉해 입 밖으로 뱉어내게 했다. 내 몸에 가래가 끓지 않지만 뭔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어지러웠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다른 침대에서 나누는 얘기가 꿈속에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환자가 심하게 콜록거리는 데 가래 색이 무슨 색인가요?”

간호사와 간병인의 대화가 짧고 간단했다.

“꺼무리한 색”, “아이보리?”,“아니, 거 꺼무리한”, “회색 정도?”, “어, 거 아닌데이….”, “분홍색 같은?” “어어, 아니, 흰색에 가까운데.”

옆에서 듣던 환자가 갑갑해 애가 타는지 기침이 터지면서 가래를 내뱉었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병실에 가득했다.

“지금은 이 색인데 찐한 거 나오면 다르데이.“

간병인 아내가 변명처럼 말을 보탰다. 간호사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일주일간 아침 하천 산책을 하지 못했다. 보충이라도 하듯 빠르게 걷는다. 장미꽃이 많이 시들었다. 검붉은 꽃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다. 보리도 어느새 알갱이가 또록또록하다. 그사이 접시꽃이 키만큼 자라 꽃망울이 가득하다. 야생 새끼 오리들이 어느새 몸집이 상당히 커져 발놀림이 빠르다. 아직 매달려 있는 장미꽃은 혹 이번 대선의 결과가 궁금해서인지도 모른다. 노랑꽃창포가 궁금해 아래쪽 하천을 향해 발걸음을 빨리한다. 이제 비가 내리고 장미꽃이 떨어지면 여름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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