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최한영 일생 다룬 ‘독립운동가 최한영 평전’ 나와
2025년 03월 25일(화) 17:45 가가
한국학호남진흥원 발행…박해현 박사 저자로 참여
독립운동가이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위원회 위원장으로 참여했던 목정(牧亭) 최한영(1899~1990) 평전이 최근 발간됐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이 발행한 ‘독립운동가 최한영 평전’은, 박해현 박사가 저자로 참여했다.
저자에 따르면 최한영은 1919년 3월 10일 광주 만세 시위 주체였던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이었다. 신문잡지종람소는 시위에 필요한 유인물 인쇄 장소를 제공해 광주 3·1운동이 성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최한영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최한영은 1899년 5월 15일 광주 사동 146번지에서 최양섭과 정운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공립광주보통학교에 입학하던 1909년은 남도 의병 활약이 절정에 다다를 때였다. 공립광주보통학교를 거쳐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한 최한영은 국권 피탈 등의 영향으로 굳건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3·1운동 관련 고초를 당했음에도 최한영은 사회운동에 앞장섰으며 일제의 자본침략에 맞선 활동을 펼쳤다. 이후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비롯해 신간회 결성 등에 앞장섰고 광주상공회의소 전신 광주상업회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사회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동시에 실천해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하는 데 진력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80의 노구에도 시민수습위원회 위원장으로 시민의 보호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1990년 8월 6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는 광주시민장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모셔졌으며, 동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제2570호)이 추서됐다.
저자 박해현은 “時·空을 초월하여 전개된 그의 삶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삶의 조각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역사적 평가를 부여하고자 하였다”고 밝혔다.
친손녀인 수필가 최은정은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으시던 생전의 모습이 뚜렷하다”며 “조국 해방과 더불어 권세와 부귀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누옥에서 서도와 국악과 궁도에 몰두, 선비로서 청빈 고고한 삶을 사셨다”고 회고했다.
한편 평전을 쓴 박해현은 전남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문학박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라남도 마한문화권개발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영암 의병사 연구’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한국학호남진흥원이 발행한 ‘독립운동가 최한영 평전’은, 박해현 박사가 저자로 참여했다.
최한영은 1899년 5월 15일 광주 사동 146번지에서 최양섭과 정운남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공립광주보통학교에 입학하던 1909년은 남도 의병 활약이 절정에 다다를 때였다. 공립광주보통학교를 거쳐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한 최한영은 국권 피탈 등의 영향으로 굳건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1990년 8월 6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는 광주시민장으로 대전 국립묘지에 모셔졌으며, 동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제2570호)이 추서됐다.
저자 박해현은 “時·空을 초월하여 전개된 그의 삶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삶의 조각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역사적 평가를 부여하고자 하였다”고 밝혔다.
친손녀인 수필가 최은정은 “삼일절 기념식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으시던 생전의 모습이 뚜렷하다”며 “조국 해방과 더불어 권세와 부귀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누옥에서 서도와 국악과 궁도에 몰두, 선비로서 청빈 고고한 삶을 사셨다”고 회고했다.
한편 평전을 쓴 박해현은 전남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문학박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라남도 마한문화권개발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영암 의병사 연구’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