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나뭇잎 사이로- 김 향 남 수필가
2025년 02월 02일(일) 22:00
그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빵과 우유로 점심을 먹는다. 일과 일 사이 잠깐의 휴식, 그의 표정은 단정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의 눈길 닿는 곳에는 나뭇잎들이 모여서 이룬 또 하나의 숲이 있다. 하늘 가운데 파놓은 빛의 연못 같기도 하고, 연못에 일렁이는 부드러운 수초 같기도 하다. 그는 주머니 속 작은 카메라를 꺼내 그 순간을 찍는다. 그 아름다움에, 신성함에, 찬란함에 감전된 듯 얼른 꺼낸 카메라에 소중히 담아 둔다. 늘 보던 풍경이지만 문득 새롭게 다가온 풍경이다. 그것은 삽시간의 황홀이고 벅찬 기쁨이다. 따듯한 위로이고 넘치는 환대다. 은총이고 자비이며 자유이고 구원이다.

그는 시내 공공화장실을 돌며 변기를 닦고 바닥을 쓸며 쓰레기를 치우는 화장실 청소부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 일을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어디에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몇 개의 조각을 통해 상상해 볼 수는 있거니와, 과거의 그는 지금과는 퍽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부유하고 더 좋은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는 모든 걸 다 잃고 가족과도 멀어져 혼자 살아가는 처지가 됐을 것이다. 몰락한 그는 어두운 골방에 처박힌 채 불쑥불쑥 세상 끝으로의 여행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부득이 화장실 청소라도 하게 됐을 것이다. 점심때면 간단한 요깃거리 하나 들고 인근의 공원으로 갔을 것이다. 어느 날은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코모레비’를 마주쳤을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그 틈새를 뚫고 오는 찬란한 빛에 저도 모르게 압도되고 말았을 것이다. 높이 뜬 두 눈을 거쳐 목구멍을, 심장을, 구석구석의 세포를 일시에 관통해 버린 빛의 세례에 흠뻑 젖어 들고 말았을 것이다. 내리꽂힌 그 빛은 첫 키스처럼 날카롭고 감미롭게 그의 생을 예견해 주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삶의 비루함 따윈 깨끗이 잊었을 것이다. 그 몰입의 순간, 빛과 잎사귀가 발하는 휘황한 광휘와 함께 어떤 틈입자가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텅 빈 채로도 가득 찰 수 있다고 속삭여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맨 밑바닥 가장 하층의 오물을 견뎌야 하는 노역의 몸을 건너뛰어 지금 여기, 삶의 모든 것을 지그시 끌어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일상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고 있으며, 허름한 집과 오래된 테이프와 구식 카메라가 전부인 삶을 살고 있다. 여전히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며, 문고판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드는 외로운 노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동정하거나 비웃을지는 몰라도 부러워하거나 성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기만 할까?

영화는 불쑥 우리에게 묻는다. 그는 전부를 다 잃어버리기만 했을까? 정말로 가난하고 불행하고 남루한 사람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에게는 여전히 남은 것이 있지 않은가. 오래된 노래와 낡은 책들과 구식 필름 카메라, 그리고 하루하루 살뜰하게 채워가는 일상의 루틴. 그것은 다소곳이 행하는 염결한 의식처럼 조촐하면서도 지고한 풍경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무엇보다 ‘코모레비’를 마주치는 순간의 빛나는 환영이 그를 투과할 때, 그는 결코 누추한 사람이 아니다. 찰나의, 그 틈새의 빛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다.

영화 막바지,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거리를 달리고 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집 앞 자판기에서 꺼낸 캔커피를 마시며 카세트테이프를 밀어 넣고 올드팝을 듣는다. 그의 얼굴은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다. 웃고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이 겹치고 뒤섞인다. 모든 것이 그 안에 농축된 듯 그의 표정은 묘하게 슬프고 묘하게 아름답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이 글은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 대한 아주 사적인 감상문입니다. ‘코모레비(木漏れ日)’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지칭하는 일본어로 이 영화의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의 빛나는 연기를 만날 수도 있겠네요.)

실시간 핫뉴스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더보기

기사 목록

광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