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아름다운 슬픔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5년 01월 06일(월) 07:00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져…’

무등산 산장 입구, 산 구비를 돌기 직전 수줍은 아이처럼 나무 숲 사이에 시비가 숨어 있다. 꼭 한 방울 눈물 같은 시비, 김현승의 시비 ‘눈물’이다.

조용조용 시를 읽어 내려간다. 그러다 보면, 숨어있는 시비처럼 시의 의미도 울음을 꾹 참고 견디며 꼭꼭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몇 차례 더 읽어가니 돌에 박힌 슬픈 시어들이 뚝뚝 깨어나 날개를 펴고 파닥거린다. 때마침 부는 바람을 타고 늦재로 바람재로, 원효사 종소리를 따라 날개를 활짝 펴고 중봉을 향해 비상하는 것 같다.

시는 슬프다. 아니 학창시절, 배운 시들 대부분 슬프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백석의 여승, 정지용의 유리창, 박용철의 나두야 간다,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 등 온통 슬프다. 누구에게나 기쁜 순간은 짧지만 그 슬픈 현실은 두고두고 고달프다. 또 살아있는 것은 어차피 유한하기에 슬프다. 우리 역사가 슬프기도 하지만 우리 삶이 근원적으로 슬퍼서 그런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슬픈 시를 읽어 가면 슬픈데, 기묘하게도 그 시를 다 읽을 즈음에는 그 슬픔이 나도 모른 사이 잔잔히 가라앉아있다. 그리고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다. 슬픔 속에는 눈물 속에는 영혼을 위무하는 그 무엇이 있기에 우리는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나는 걸까.

김현승 시인은 윤동주를 보는 것처럼 가냘프다. 그는 7살 때부터 광주에 살지만 진학을 위해 광주를 벗어난다. 그리고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던 3학년 때 다시 광주로 되돌아온다. 1935년 우가키 총독은 신사참배를 강화하고 참배 거부를 빌미로 숭실학교를 폐교시켰다. 그때 다형의 위장병도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가 식민지 시대, 고통 받는 민족의 비애를 담아낸 것이 시대적 산물이라면, 생명의 근원적인 한계를 직시한 것 또한 개인적 건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광주로 온 그는 숭일학교 교감으로 취임하고,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6월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 지역 작가들과 함께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할 정도로 시에 대한 열정을 쏟는다.

그리고 조선대 교수로 재임 중이던 그 해, 4살 된 아들을 잃는다. 전쟁 중이었으니 약 한번 재대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오직 하나 기도, 그 자식을 데려간 신에게 매달리는 일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고통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담아낸, 슬픔을 극도로 절제하여 눈물로 쓴 추도시가 바로 눈물, 바람재의 바람 소리처럼 지금도 울음을 그치지 못한 눈물이다.

시를 읽어가면서 자식 잃은 아버지의 마디마디 맺힌 절통한 한이 느껴진다. 지신이 믿고 의지한 신을 원망할 수 없는 슬픔, 그럴수록 더욱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슬픔의 무게를 시로 표현했다고 조금이나마 가뿐해졌을까.

아들이 잠든 광주가 싫었을까. 그는 1960년 조선대 부총장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짐을 챙겨 광주를 떠난다. 숭실대 부교수로 취임한 후로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허무에 대한 시를 쓴다. 그리고 1975년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외모와 표정에 나타난 것처럼 삐쩍 마르게 온통 슬프다. 그의 고독을 위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신앙이었고, 또 하나는 자유였을 것이다. 기독교가 들숨이었다면 날숨인 문학이 있어서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다형은 광주에 살면서도 늘 고향땅 평양을 잊지 못한 듯하다. 그는 광주와 평양을 오가며 일생을 살았다. 그의 삶 절반은 광주이고 반은 평양이었다. 또 반은 신앙이었고, 나머지 반은 시였다. 무등산에서 그의 삶을 읽고, 그의 시를 읽는다. 그의 삶은 슬프고 그의 시는 더 슬프다. 그래서 아름답다. 슬퍼서 아름답다. 시퍼렇게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워서 슬프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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