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강이 있었다- 김 향 남 수필가
2024년 12월 16일(월) 00:00 가가
1. 강이 있었다. 강은 넓고 평평하고 길고 유유했다. 강이 있어 산은 더 높아 보였고 들판은 더 멀어 보였으며 마을은 더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강은 산을 비추고 마을을 비추고, 그리고 하늘을 비추었다. 강의 빛깔은 희고 검고 푸르고 어슴푸레했다. 강의 소리는 잠잠하고 부드럽고 낭랑하고 거칠었다. 강의 시간은 고요히 윤슬을 내비치고 있거나 잔물결을 찰랑거리고 있거나 이따금 요동치며 몸을 뒤척였다. 바람을 만나면 바람과 놀고 구름을 만나면 구름과 놀았다. 해와 달과 별을 품고 뭇 생명을 품어 키웠다.
2. 그 강에서 여름이면 멱을 감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속을 첨벙댔다. 처음에는 강가 얕은 곳에서 물장구나 치며 놀다가 차츰 헤엄을 칠 수 있게 되었다. 바닥에 발을 대지 않고도 몸이 떠올랐고 물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볼 수도 있었다. 또래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물에 등을 대고 누울 때면 혼자라도 좋았다. 그럴 때면 왁자한 친구들의 소리는 아득히 멀고, 눈부셔 바라보기도 힘든 하늘의 태양이나, 저 건너 높이 솟은 검푸른 산마루나, 층층이 내려앉은 자잘한 논밭들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구부러져 돌아가는 긴 황톳길도, 구름이 피워내는 기묘한 형상들도 다 내 머리 위에 있었다. 나는 한 조각 작은 배였다. 찰싹이는 물의 노래를 들으며 긴 꿈을 꾸곤 하였다.
3. 배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 사공도 있었다. 사공은 마을에서 떨어진 강가 외딴집에 살았다. 그는 노를 저어 사람들을 건네주었다. 그의 노 젓기는 깊은 믿음을 주었다. 바람 세차고 풍랑 거친 날에도 그라면 능히 건너갈 수 있었다. 그의 솜씨는 능숙하고 안전했다. 그러나 그는 차차 별로 부를 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노를 젓는 대신 줄을 매어 당기는 줄배로 바뀌면서였다. 줄을 당길 힘만 있으면 누구라도 사공이 될 수 있었다. 다리가 놓이면서는 아예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강을 떠나지 않았다.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다. 그의 아내는 그가 잡은 물고기들을 머리에 이고 장에 내다 팔았다. 그는 누구에게나 ㄱ(기역)자로 인사했고 언제나 공손했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4. 강은 노래하고 춤추었다. 진달래 피고 벚꽃 흐드러진 봄날이면 강물도 찰랑찰랑 제 몸을 흔들었다. 땅에도 나뭇가지에도 새싹이 움텄다. 제비는 돌아와 처마 밑에 깃들었다. 바람도 흥얼흥얼 봄기운을 실어 왔다. 언제나 일 구덩이에 빠져 살던 엄마(들)도 하루쯤은 기꺼이 봄맞이에 나섰다. 꽃피는 춘삼월 연중행사처럼 벌이는 엄마들의 놀이판, 화전놀이였다. 그곳에선 엄마들도 강물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즐겼다. 어디에 그런 흥이 있었을까.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떠드는 엄마들의 하루는 전혀 고루하지 않았다. 만화방창 호시절에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흥에 겨운 노랫소리가 뱃전을 울렸다. 강물도 넘실넘실 장단을 맞추었다. 격정의 하루가 저물고 엄마들은 다시 엄마로 돌아왔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식구들을 건사했다. 씨 뿌리고 김을 매고 길쌈하고 베를 짰다. 고단한 날들에 허리가 휘었지만 그 하루, 삶의 활력소가 된 것만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5. 아주 가끔 강이 바닥을 보일 때가 있었다. 강 아래쪽에 작은 수력발전소가 있었고 그곳에선 이따금 수문을 열었다. 방방하던 물이 빠져나가고 강이 바닥을 드러낼 때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강으로 갔다. 질퍽한 강의 밑바닥엔 주먹만 한 조개들이 널려 있었다. 홍합보다 더 크고 더 통통하고 더 까만 그것을 우리는 마개라고 불렀다. 그 큰 마개가 손에 잡힐 때면 금덩이라도 거머쥔 듯 오지고 좋았다. 몇 개만 잡아도 한 양푼이 금방 찼다. 옷이며 얼굴이며 팔다리까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됐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도 없었다. 다시 강물이 불고 바닥이 제 몸을 숨길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날은, 지금 생각해도 만족스럽기 한량없다.
6. 강은 언제나 있었다. 강은 삶처럼, 삶은 강처럼 흘렀다. 맑고 잔잔한 날도 있었고 세차게 요동치는 날도 있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날도 있었고 바람처럼 출렁이는 날도 있었다. 벼락과 천둥이 들이칠 때도 있었고 꽁꽁 얼어붙은 날도 있었다. 쩌렁쩌렁 우는 날도 있었고 드높이 노래하는 날도 있었다. 강은 쉼 없이 꿈틀대고 멈추고 나아가며 유유히 흘렀다. 흐르고 흘러도 다 못 흘러서 오늘도 여전히 흐르는 중이다.
5. 아주 가끔 강이 바닥을 보일 때가 있었다. 강 아래쪽에 작은 수력발전소가 있었고 그곳에선 이따금 수문을 열었다. 방방하던 물이 빠져나가고 강이 바닥을 드러낼 때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강으로 갔다. 질퍽한 강의 밑바닥엔 주먹만 한 조개들이 널려 있었다. 홍합보다 더 크고 더 통통하고 더 까만 그것을 우리는 마개라고 불렀다. 그 큰 마개가 손에 잡힐 때면 금덩이라도 거머쥔 듯 오지고 좋았다. 몇 개만 잡아도 한 양푼이 금방 찼다. 옷이며 얼굴이며 팔다리까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됐지만 그런 것쯤은 아랑곳도 없었다. 다시 강물이 불고 바닥이 제 몸을 숨길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날은, 지금 생각해도 만족스럽기 한량없다.
6. 강은 언제나 있었다. 강은 삶처럼, 삶은 강처럼 흘렀다. 맑고 잔잔한 날도 있었고 세차게 요동치는 날도 있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날도 있었고 바람처럼 출렁이는 날도 있었다. 벼락과 천둥이 들이칠 때도 있었고 꽁꽁 얼어붙은 날도 있었다. 쩌렁쩌렁 우는 날도 있었고 드높이 노래하는 날도 있었다. 강은 쉼 없이 꿈틀대고 멈추고 나아가며 유유히 흘렀다. 흐르고 흘러도 다 못 흘러서 오늘도 여전히 흐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