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비상계엄’ 어떻게 5·18 광주 학살로 이어졌나
2024년 12월 08일(일) 20:20 가가
고립무원의 계엄해제 항거…민주화 촉구 투쟁으로 번졌다
전남대 총학생회 5월초부터 “계엄령 해제” 등 요구…전국적 시위 확산
서울 소재 대학 총학회장들 돌연 해산…광주선 시민 등 시국성토대회
18일 새벽 0시 계엄령 전국으로 확대…7공수여단 공수부대 광주 투입
전남대 총학생회 5월초부터 “계엄령 해제” 등 요구…전국적 시위 확산
서울 소재 대학 총학회장들 돌연 해산…광주선 시민 등 시국성토대회
18일 새벽 0시 계엄령 전국으로 확대…7공수여단 공수부대 광주 투입


1980년 5월 16일 전남대 학생들을 비롯한 광주시민들이 ‘계엄 철폐’, ‘전두환 타도’ 등 구호를 외치며 광주시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으로 집결하고 있다. <광주일보 자료사진>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1979년 발령된 비상계엄이 어떻게 5·18 광주 학살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하기 전, 비상계엄령이 발동됐던 것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직후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을 확인한 정부는 10월 27일 새벽 2시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최규하 국무총리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추대하고 같은 날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선포했다. 이 때 전두환씨를 주축으로 한 ‘신군부’는 그동안 규합해 온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정치권에서는 유신철폐와 긴급조치 9호 해제, 정치범 석방, 대통령 직접선거 등을 요구했고, 대학생들은 긴급조치 9호 등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신학기에 복학시킬 것을 요구했다.
개학 이후인 1980년 3월부터는 본격적인 대학가 시위가 불붙으며 총학생회 부활, 학원 자율화·민주화, 어용교수 퇴진 등 요구가 터져나왔다.
5월부터는 각 대학에서 학원 민주화를 넘어 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 등 정치적 요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판단에서다.
전남대 총학생회 또한 5월 초부터 민주화 목소리를 내 왔으며, 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을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정하고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시위는 5월 15일 절정을 이뤘다. 서울역 인근에 서울시내 30개 대학교, 10만 명의 대학생이 모여 ‘계엄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한 것이다.
이 때 서울 지역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은 돌연 시위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으로, 서울 곳곳에 공수부대와 장갑차 등이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대규모 유혈사태를 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민주화 불길은 더 거세게 타올랐다. 16일에도 광주에서는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해 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했다.
5·18 당시 전남대 들불야학 학생들과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했던 전용호 작가는 “당시 인구 65만명 수준인 광주에서 5만명이 모여 시위를 하니, 사실상 광주 시민 전체로 소문이 퍼져 있던 상황”이라며 “전두환이 누군지도 잘 모르던 시민까지도 한 마음으로 뭉쳐 공분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5·18 시민군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던 이재의씨는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대로 시위가 격화되다간 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커지기는 했다”면서도 “하지만 공포감보다는 ‘민주화 열기가 이만큼 뜨겁구나’ 하는 고양감이 더 컸다. 그래서 서울역 회군 소식을 듣고도 하루라도 더 집회를 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군부 세력은 전두환씨의 집권 성공을 위해 야권과 노동계, 학원 민주화 분위기를 차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씨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 후 작성한 ‘학원대책방향’ 보고서가 근거다. 보고서에는 대학가 시위가 대정부 전복을 목표로 한 2단계 투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강력 진압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신군부는 5월 들어 국회 정상화 등 논의가 활발해지자,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경우 집권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쿠데타’를 실행했다.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국방부장관과 군 지휘관들로부터 ‘비상계엄 확대 찬성’에 대한 백지(白紙) 의결서를 받아내고, 이를 빌미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정부는 ‘포고령 10호’를 내리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 언론 등 사전검열, 대학 휴교, 태업·파업행위 등 금지,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을 강요하고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 처단할 것을 공포했다.
18일 새벽 0시를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전남대, 조선대에는 7공수여단 공수부대가 투입됐으며 광주시내 각 전문대 관공서 등에도 계엄군이 배치되고 대학생 수십명이 계엄군에 연행됐다.
전용호 작가는 “광주 대학생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계엄령 전국 확대 이후인 18일 오전,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에 반발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계엄 철폐’를 외쳤다.
계엄군은 시위 학생이 불어나자 진압봉을 휘둘러 강경 진압을 시작했고, 이에 학생들은 일시 후퇴했다가 금남로로 모여 ‘계엄 철폐’, ‘전두환 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이 때 계엄군은 돌연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7공수여단이 남녀를 불문하고 진압봉과 군홧발, 개머리판, 대검 등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을 펼친 것이다.
계엄군의 폭력을 목도한 광주시민들은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쳐 계엄군에 대항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하기 전, 비상계엄령이 발동됐던 것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직후다.
이후 정치권에서는 유신철폐와 긴급조치 9호 해제, 정치범 석방, 대통령 직접선거 등을 요구했고, 대학생들은 긴급조치 9호 등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신학기에 복학시킬 것을 요구했다.
전남대 총학생회 또한 5월 초부터 민주화 목소리를 내 왔으며, 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을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정하고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전국적으로 시위는 5월 15일 절정을 이뤘다. 서울역 인근에 서울시내 30개 대학교, 10만 명의 대학생이 모여 ‘계엄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한 것이다.
이 때 서울 지역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은 돌연 시위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으로, 서울 곳곳에 공수부대와 장갑차 등이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대규모 유혈사태를 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민주화 불길은 더 거세게 타올랐다. 16일에도 광주에서는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해 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했다.
5·18 당시 전남대 들불야학 학생들과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했던 전용호 작가는 “당시 인구 65만명 수준인 광주에서 5만명이 모여 시위를 하니, 사실상 광주 시민 전체로 소문이 퍼져 있던 상황”이라며 “전두환이 누군지도 잘 모르던 시민까지도 한 마음으로 뭉쳐 공분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5·18 시민군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던 이재의씨는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대로 시위가 격화되다간 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커지기는 했다”면서도 “하지만 공포감보다는 ‘민주화 열기가 이만큼 뜨겁구나’ 하는 고양감이 더 컸다. 그래서 서울역 회군 소식을 듣고도 하루라도 더 집회를 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군부 세력은 전두환씨의 집권 성공을 위해 야권과 노동계, 학원 민주화 분위기를 차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씨가 1980년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 취임 후 작성한 ‘학원대책방향’ 보고서가 근거다. 보고서에는 대학가 시위가 대정부 전복을 목표로 한 2단계 투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강력 진압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신군부는 5월 들어 국회 정상화 등 논의가 활발해지자,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경우 집권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쿠데타’를 실행했다.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국방부장관과 군 지휘관들로부터 ‘비상계엄 확대 찬성’에 대한 백지(白紙) 의결서를 받아내고, 이를 빌미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때 정부는 ‘포고령 10호’를 내리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 언론 등 사전검열, 대학 휴교, 태업·파업행위 등 금지,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을 강요하고 위반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 처단할 것을 공포했다.
18일 새벽 0시를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전남대, 조선대에는 7공수여단 공수부대가 투입됐으며 광주시내 각 전문대 관공서 등에도 계엄군이 배치되고 대학생 수십명이 계엄군에 연행됐다.
전용호 작가는 “광주 대학생들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계엄령 전국 확대 이후인 18일 오전,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에 반발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몰려들어 ‘계엄 철폐’를 외쳤다.
계엄군은 시위 학생이 불어나자 진압봉을 휘둘러 강경 진압을 시작했고, 이에 학생들은 일시 후퇴했다가 금남로로 모여 ‘계엄 철폐’, ‘전두환 타도’ 등 구호를 외쳤다.
이 때 계엄군은 돌연 무자비한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7공수여단이 남녀를 불문하고 진압봉과 군홧발, 개머리판, 대검 등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을 펼친 것이다.
계엄군의 폭력을 목도한 광주시민들은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쳐 계엄군에 대항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