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말의 귀환 - 김향남 수필가
2024년 11월 18일(월) 00:00 가가
오랜만에 나들이 계획을 세웠다. 장거리에다 당일치기였으므로 새벽같이 출발하자고 했다. 그러자면 일찍 자 두어야 할 터였다. 몇 가지 채비를 해놓고 막 자리에 들려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반갑잖은 표정이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곧장 귀에 걸렸고 동시에 내 얼굴은 샐쭉해졌다. 누구인지, 무슨 내용인지 안 물어봐도 훤했기 때문이다.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없던 일이었다. 같은 통로에 나란히 살고 있었으나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가, 어느 날 아내들이 모인 자리에 남편들이 끼게 되고, 여차저차 그들끼리 당구장으로 가게 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이었다. 또래 아이들의 아버지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그리고 같은 연령대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은 순식간에 물 만난 고기가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불금’이 시작되었다.
아내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할 일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 그 틈새를 좀 활용해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좀 그렇지 않은가? 공연히 고까운 마음도 드는 데다 아랫집은 주말부부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사정은 아랑곳도 없는 듯 그들의 회동은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말 그대로 ‘당구 한판 치고 간단히 생맥주 한잔 마셨을 뿐’인데 꼴딱 날을 새기 일쑤였다.
역시나 오늘도 삼경을 넘고 사경도 넘어서야 삑삑삑삑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나저제나 비몽사몽 중에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은 단번에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거듭한 끝에야 겨우 그가 들어왔다. 아, 미안미안. 빨리 올라고 했는데 어쩌구저쩌구……. 왜 이렇게 늦었냐는 물음 따윈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구, 참말로 호랭이 물어가네.”
내 입에서는 등짝 스매싱을 능가하는 속사포가 발사됐다. 비틀비틀 그는 침실로 들어가고, 순간 나는 뭔가에 붙들린 듯 고개를 갸웃했다. 호랭이 물어가네? 기분이 묘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랭이’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 낯선 듯 낯이 익은 듯 신기하기만 했다. 그 끝에 엄마가 보였다. 그것은 엄마의 말이었다. 아니 그 시절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상투어였다. 여차하면 어이구 호랭이 물어가네잉, 호랭이 물어가고 자빠졌네, 호랭이 물어갈 × 등등의 말들이 자동 발사되곤 했다.
‘호랭이…’로 시작되는 말들은 어떤 상황이 너무 어이없거나 갑작스러울 때, 뜻밖의 일이거나 엉뚱하다 싶을 때 주로 사용되는 표현이었다. 기쁨과 슬픔, 반가움, 놀람, 비아냥, 빈정거림, 아쉬움 등등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애용되었다. 사람들은 ‘호랭이(호랑이가 아니고)’를 내세워서 말맛을 살리고,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분위기 혹은 느낌을 드러냈으며, 쌓인 것들을 풀어내고는 했다.
엄마에게는 ‘호랭이’를 불러낼 일이 자주 있었다.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남편에 억센 자식들에 매일매일 허덕이는 노동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엄마는 애꿎은 ‘호랭이’라도 불러내야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다. ‘호랭이’를 통하여 답답함을 풀고 화를 삭였으며 평정심을 되찾으셨을 것이다. 옆집 상수 엄마도 그랬다. 인근에선 알아주는 명문고를 나왔다는 상수 아버지는 이도 저도 아닌 술주정뱅이였다. 그 집을 지날 때면, ‘아이고, 내 팔자야. 대롱산 호랭이는 뭣을 먹고 사나 몰라….’ 상수 엄마의 푸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 입살에 ‘호랑이’만큼 자주 오르내린 동물도 없지 싶다. 실제로 호랑이는 한반도의 숲과 자연을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였다고 한다. 생태환경의 변화와 무분별한 사냥, 식민지 시기 해수구제(害獸驅除)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대대적인 소탕 정책 등으로 인해 이 땅의 호랑이들은 끝내 멸종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의식 속에 수많은 이야기와 그림과 말들을 만들어내며 뿌리 깊은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는가.
요즘 들어 떠나신 지 오랜 엄마의 말들을 자주 마주친다. 그 말이 놓인 순간의 상황이며 장면이며 표정까지 또렷이 되살아나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어디에 박혀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들을 따라 들어가 보면, 거기 몹시도 반갑고 그리운 것들이 애틋하게 피어나고 있다.
“아이구, 참말로 호랭이 물어가네.”
내 입에서는 등짝 스매싱을 능가하는 속사포가 발사됐다. 비틀비틀 그는 침실로 들어가고, 순간 나는 뭔가에 붙들린 듯 고개를 갸웃했다. 호랭이 물어가네? 기분이 묘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랭이’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 낯선 듯 낯이 익은 듯 신기하기만 했다. 그 끝에 엄마가 보였다. 그것은 엄마의 말이었다. 아니 그 시절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상투어였다. 여차하면 어이구 호랭이 물어가네잉, 호랭이 물어가고 자빠졌네, 호랭이 물어갈 × 등등의 말들이 자동 발사되곤 했다.
‘호랭이…’로 시작되는 말들은 어떤 상황이 너무 어이없거나 갑작스러울 때, 뜻밖의 일이거나 엉뚱하다 싶을 때 주로 사용되는 표현이었다. 기쁨과 슬픔, 반가움, 놀람, 비아냥, 빈정거림, 아쉬움 등등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애용되었다. 사람들은 ‘호랭이(호랑이가 아니고)’를 내세워서 말맛을 살리고,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분위기 혹은 느낌을 드러냈으며, 쌓인 것들을 풀어내고는 했다.
엄마에게는 ‘호랭이’를 불러낼 일이 자주 있었다.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남편에 억센 자식들에 매일매일 허덕이는 노동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엄마는 애꿎은 ‘호랭이’라도 불러내야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다. ‘호랭이’를 통하여 답답함을 풀고 화를 삭였으며 평정심을 되찾으셨을 것이다. 옆집 상수 엄마도 그랬다. 인근에선 알아주는 명문고를 나왔다는 상수 아버지는 이도 저도 아닌 술주정뱅이였다. 그 집을 지날 때면, ‘아이고, 내 팔자야. 대롱산 호랭이는 뭣을 먹고 사나 몰라….’ 상수 엄마의 푸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 입살에 ‘호랑이’만큼 자주 오르내린 동물도 없지 싶다. 실제로 호랑이는 한반도의 숲과 자연을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였다고 한다. 생태환경의 변화와 무분별한 사냥, 식민지 시기 해수구제(害獸驅除)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대대적인 소탕 정책 등으로 인해 이 땅의 호랑이들은 끝내 멸종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의식 속에 수많은 이야기와 그림과 말들을 만들어내며 뿌리 깊은 흔적을 남겨 놓지 않았는가.
요즘 들어 떠나신 지 오랜 엄마의 말들을 자주 마주친다. 그 말이 놓인 순간의 상황이며 장면이며 표정까지 또렷이 되살아나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어디에 박혀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들을 따라 들어가 보면, 거기 몹시도 반갑고 그리운 것들이 애틋하게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