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집게-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11월 11일(월) 00:00
텅 빈 마당, 앞마당을 가로질러 빨랫줄이 처마 밑에서 행랑채로 길게 늘어져 있다. 작열하는 태양에 지친 일상을 만끽이라도 하듯 바지랑대에 기대어 빨랫줄이 축 늘어진 채, 졸고 있다.

언뜻 보면 지나쳤을 것이다. 빨랫줄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늘 그랬다. 존재하고도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쑤인 것이 집게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늘 거기에 있어서 딱히 시선을 집중하고 자세히 살피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았다. 내면의 눈을 떠야만 볼 수 있는 빨랫줄에 매달린 집게, 아내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낚시가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낚시는 내 전부였다. 주중도 부족해 주말이면 1박 2일로 다녔다. 그렇게 낚시에 빠졌다가 희뿌옇게 동이 트고서야 허겁지겁 직장으로 출근하기를 여러 날. 너끈히 두어 계절이 바뀐 어느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집이 굳게 잠겨있었다. 친구들과 처가에 부랴부랴 전화했으나 아내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늦은 밤, 아이를 업고 들어온 아내는 뜻밖에도 시골 아버지의 제사에 다녀온 길이었다. 아이를 업고 시골에서 보내준 여러 물건을 양손에 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사코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아내는 내 몸속의 사행심이 빠져나갈 때까지 지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아내 덕분에 나는 낚시를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기일이나 간혹 양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낚싯바늘 같은 집게가 아직도 나를 꼬집고 있다.

빨랫줄에 걸린 분신들, 빨래들이 바람에 팔랑거린다. 국수 다발처럼 하얀 기저귀 수십 장이 바람을 만들어내면, 누이의 새하얀 옷들과 내 구멍 난 팬티가 어머니의 색동저고리와 형의 낡은 잠바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가 숨었다. 그러고 보면 빨랫줄에는 빨래만 널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패하지 않고 잘 건조되도록 한 가족의 삶이 오롯이 걸려 있었다.

낚시에서 벗어난 나는 이번에는 친구, 아니 술에 빠지고 말았다. 정이 오고 가듯 술 또한 주고받는 것이어서, 자연히 과음하게 되었다. 술 마시는 친구끼리 만남이 잦아지면 나는 나대로 친구를 불러내고, 친구는 친구대로 술친구를 끌어들였다. 그러다 보니 1차가 2차가 되고, 2차가 3차가 되어서 술을 마시는 사람의 숫자는 물론 관계도 급격히 늘어났다. 응당 시간과 양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얽히는 일들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술의 마법, 아니 술의 부작용이다.

사람에 멍들고, 술에 두들겨 맞아서 비틀거리며 들어올 때마다 아내는 술을 탓한 적은 없었다. 내 인격을 애써 추켜올리며 술로 인해 내 격에 흠이 가지 않도록 술을 다스리도록 해주었다. 술 한잔할 때나 집에 돌아올 즈음에 나는 늘 내 마음 한구석을 꽉 붙들고 있는 아내의 집게를 생각하고 내 몸을 곧추 바로잡았다.

등산이나 야구 동호회에 빠져서도 나는 한시도 빨랫줄에 매달려 있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시로 부는 유행 또한 내 마음을 부풀려 내가 멀리 날아가도록 유혹했다. 그때마다 아내의 고독을 외면한 채, 나는 아주 멀리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세계로 날아가는 탈출의 꿈을 펼치곤 했다. 그렇게 나는 빨래였고 아내는 언제나 집게였다. 바람 따라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가고자 빨래가 몸부림을 칠 때마다 집게는 두 톱니가 망가지도록 빨래만을 붙들었을 것이다.

내 몸을 가득 채운 허욕의 물이 적잖게 무거웠을 터이지만, 빨래 속의 욕망이 증발해 가볍게 펄럭일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 저리 가녀린 손목으로, 가녀린 몸으로 튼튼히도 나를 붙들 수 있었을까.

요즘의 집게들은 잘도 부서진다. 그래서인지 쉽게 헤어지는 신혼부부들도 많다. 어쩜 내 아내의 집게가 튼실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진즉 어디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다.

나와 아내가 이승을 다하고 분리될 때, 내가 저 푸른 하늘로 날아갈 때, 저 집게는 정녕 나를 아프지 않게(?) 놓아줄 수 있을까. 집게의 악력이 견딜 수 있도록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얌전한 빨래가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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