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들의 축제’(?)가 된 문화광주 - 박진현 문화·예향국장, 선임기자
2024년 10월 16일(수) 00:00
지난달 30일 스페인의 세비아 중심가에 자리한 ‘엘 팔라치오 안달루스’ 공연장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매일 저녁 7시30분 열리는 스페인의 전통공연 플라멩고(Flamenco Tablao)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공연 30분 전부터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관광버스는 개막 시간이 다가오자 수십 여대로 늘어났다.

무대 조명이 켜지자 화려한 의상의 남녀 무용수와 가수들이 등장해 극장의 적막을 깨뜨렸다. 치렁치렁한 주름 치마를 입은 집시가 애절한 기타 선율과 노래에 맞춰 발을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수백 년 전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동굴에 숨어 살아야 했던 집시들의 한이 서린 춤사위는 5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글로벌 관객 ‘홀리는’ 플라멩고

‘스페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플라멩고를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슬람과 스페인 문화가 어우러진 ‘스페인광장’이 세비야의 심장이라면 플라멩고는 세비야의 핏줄이라는 것이다. 낮에는 스페인광장과 유명 관광지를 둘러 보고 밤에는 플라멩고를 ‘직관’하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얻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1년 365일 세비야의 극장에서 펼쳐지는 플라멩고 공연은 매회 매진을 기록할 만큼 스페인을 상징하는 ‘브랜드’이다.

이날 1시간 30분의 무대가 끝나자 공연장 주변은 관객들을 숙소로 실어 나르는 수십 여대의 버스 행렬로 또 한번 장관을 연출했다. 그 순간, 지난 2015년 중국 베이징에서 봤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베이징 관광객의 필수코스로 불리는 ‘금면왕조’(金面王朝)는 중국 고대 신화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를 다룬 가무쇼다.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두 차례 열리는 공연에 수천 여 명이 다녀갈 정도다.

사실 스토리는 평범하다. 금빛가면을 쓴 여왕이 다스리는 여인천하(금면왕국)에 어느 날, 남자들만 사는 남면왕국이 쳐들어온다. 치열한 싸움 끝에 금면왕국이 승리를 거두고, 남면왕국의 왕은 포로신세가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하늘의 저주로 대홍수를 겪게 되면서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다. 하지만 여왕이 자신의 몸을 던져 왕국을 구한 후 태양조(太陽鳥)로 부활해 금면왕국을 지켜내는 해피엔딩으로 막이 내린다.

뭐니뭐니해도 금면왕조의 하이라이트는 모세의 기적과 맞먹는 일명 홍수씬(scene)이다. 극의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360도 회전이 가능한 무대 위에서 500여 톤의 물이 실제로 휘몰아치는 장면은 객석을 압도한다.

며칠 전,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미술장터 ‘아트:광주:24’(10월10~13일)를 둘러보기 위해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시선을 잡아 끈 ‘주인공’(?)이 있었다. ‘2024 광주김치축제’, ‘장흥대한민국 통합의학박람회’, ‘2024 광주비엔날레’ ‘아트:광주:24’등의 문화이벤트와 발라드, 밴드, 트로트 등 대중가수들의 광주콘서트를 홍보하는 배너광고들이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펄럭이는 수십 여개의 배너들은 ‘축제의 계절’이 도래했음을 실감케 했다.



비엔날레 특수 못살린 예술관광도시

그중에서도 막강한 팬덤을 자랑하는 대형가수들의 콘서트 배너들이 눈에 많이 띄어 가슴이 설레였다. 개막 두 달째를 앞두고 있는 광주비엔날레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파빌리온 전시장(광주시립미술관, 양림동)등 지역의 문화현장이 전국에서 온 수천 명의 팬들로 활기가 넘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1회 평균 4000~5000여 명의 관객 동원력을 뽐내는 가수들의 팬들이 콘서트도 보고 다른 광주의 명소들을 둘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호기심에 X(옛 트위터)나 팬카페, 커뮤니티 등을 둘러보니 ‘축제 특수’는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유감스럽게도 비엔날레나 ACC 등과 관련된 검색어나 정보 대신 맛집이나 담양, 장성 등 인근에 가볼 만한 명소들을 추천해달라는 글이 많았다. 특히 올해는 광주비엔날레가 창설 30주년을 맞은 특별한 해인데도 외지인들의 ‘방문 리스트’에서는 찾기가 힘들었다. 현대미술축제에 관심이 없는, 팬들의 취향 탓이라고 ‘위안’을 삼기에는 글로벌 브랜드를 지향하는 광주비엔날레의 명성을 무색케 했다.

이런 마음을 눈치라도 챈듯 아트광주에서 만난 50대 부부의 쓴소리가 가슴에 와 박힌다. 비엔날레와 아트광주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왔다는 이들은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가 ‘판소리, 모두의 울림’이어서 저녁에 판소리나 국악무대가 있으면 관람하고 다음날 여수로 갈 계획이었는 데 마땅한 공연이 없다”면서 “비엔날레 기간만이라도 외지인들을 위해 광주의 전통예술인 판소리공연을 기획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기분 탓일까. 전시장을 나오는 길, 어두운 거리에 내걸린 화려한 디자인의 ‘G-페스타 광주’(지역 축제·행사 통합 브랜드) 배너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마치 문화도시의 민낯을 들킨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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